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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 철부지 어린 시절2022-10-01 16:19
작성자 Level 10

1. 철부지 어린 시절

 

내 고향 칠곡 가산
 
고향. 고향이란 말을 듣고 마음이 설레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다. 짐승도 죽을 때면, 제가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돌린다는 말이다. 이제 나도 갈 때가 됐다. 방정맞은 생각이 드는 것은 분명 나이 탓일게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 앞산이 눈에 떠오른다.
가산, 황락산과 소락산을 끼고 있는 내 고향 칠곡 가산.
나는 경상북도 칠ㄹ곡국 가산면 하판동에서 1921년 음력 2월 6일날 태어났다. 이곳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야산 국립공원이 있다. 가야산은 지난날 가야국(伽倻國)의 중심이다. 훗날 내가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때 주위사람들로부터 ‘가야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공교롭게도 가야국의 가실왕때 가야금의 명인 우륵이 12줄의 가야금을 만들었던 곳이기도 하고, ‘상가라도(上加羅都)’와 ‘하가라도(下加羅都)’라는 12곡의 가야금곡을 짓기도 하였다.

참으로 묘하게도 가야금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나와는 어떤 필연적인 인연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옛 가야국이었던 나의 고향 칠곡에서 나는 오빠 일곱명을 둔 막내이면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산면에서 알아주는 대농이었고 어머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한국적인 그런 어머니셨다. 때론 엄격하시면서도 따뜻한 정감이 항상 넘쳐나는 그런 분이셨다.
나의 아명은 장영심(永心)이다. 아버지는 인동(仁同) 장씨(張氏)이고 함자는 ‘병(炳)’자 ‘관(官)’자인데, 기골이 장대한 무관 출신 집안이었다. 해방후 내무장관과 치안총수를 지낸 장택상씨도 우리 인척이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기억이 별로 많지 않다. 단지 말이 없고 엄격하셨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버지의 따뜻한 정을 느끼며 자라지는 못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나 객지로 떠돌아 다녔던 탓도 있었지만,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에 장씨 집안과 타의에 의해 절연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뒤에 하겠지만, 오늘날 나의 이름인 ‘박귀희’는 국악에 입문하던 시절 붙인 예명이고, 나의 아명은 장영심이다. 그리고 식으로 호적에 오른 오계화(吳桂化)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나는 내 고향 칠곡에서 일곱 살 나던 해까지 살았다. 철모르던 시절에 살았던 나의 고향 칠곡이지만, 그래도 개울가에서 송사리를 잡고 잠자리를 좇으면서 개구쟁이로 지냈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다.
지금은 내가 살던 고향 동네 고향 집의 옛날 흔적은 찾아 볼 수도 없이 변했지만, 그래도 내 고향 칠곡은 언제라도 달려가면 따뜻하게 반겨줄 것만 같은 아늑하고 포근한 곳이다.

 

 

어머니께서 들려주신 꿈 이야기

흔히들 집안에 무슨 인물이 났다거나 훌륭하게 되면, 무슨 태몽이 어쨌느니, 그 때 꿈이 어쨌느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지난번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에 대한 신문기사에 태몽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나온 것을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햇다.
하긴 사람을 태어나면서 태몽없이 태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고 어떤 역학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확실히 뭔가 큰 일을 해낼 사람은 태몽이 달라도 뭔가 다른 모양이다.
나에게도 이런 태몽이 있었을까? 언젠가 어머니께서는 국악인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귀희야. 참으로 꿈이란게 요상하지. 난 말이다. 너를 갖고서 태몽을 세 번씩이나 꾸었는데, 그때 해몽가 말로는 네가 보통 평범한 인물로 살지 않을거라고 하더구나. 그런데, 결국 네가 국악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팔자였던 모양이다.”
사실 나는 팔자를 믿지 않는다. 우리 옛 어른들은 툭하면 팔자 타령에 팔자소관이라고 쉽게 이야기 하지만,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냥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국악인으로서 문화재로 지정받고 명창소리를 듣게 된 데까지는 결코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그 때문에 보통 평범한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어머니께서 해주신 태몽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꿈에 어머니께서 길을 가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원님 행차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다 보니, 장소는 지금의 대구 팔달교를 넘어서 ‘동명’이라는 동네였다는 것이다. 그 마을에는 큰 시내가 흐르고 냇가 둑 위로 신작로가 닦여 있었는데, 원님이 행차를 하자 많은 사람들이 뒤를 좇았다고 한다. 앞에서는 사령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푸른 대나무를 들고 나팔, 바라, 호적을 불며 가는데 꼭 생시 같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진주 대나무를 위로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술래위’ 하고 치켜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저 대나무를 올릴 때 가지를 꺾어 가지면, 평생소원을 이룬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그 길로 언덕 위로 올라가 대나무가 치켜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재빠르게 가지를 꺾어 갑사 치마 속에다가 숨겨 도망을 쳤다는데, 도망친 곳이 어느 부잣집 다락이었다는 것이다. 다락안에는 번쩍이는 자개농이 꽉 차있고, 뒷문 창이 있어 그 속으로 가만히 숨어서 치마를 벌려 들여다 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아버지께서는 “어허, 그거 틀림없이 태몽이구려, 태몽.” 하며 좋아하셨고, 어머니께서는 그 달부터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얼마인가 지나서 어머니는 또 꿈을 꾸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대구 용두방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옛날 용두방천 상류에는 큰 둠벙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빨래를 하다가 보니, 그 둠벙둘레를 갑자기 오색채운이 둘러싸면서 하늘에는 무지개가 서고 물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더라는 것이다. 검은 구름이 뭉쳐 용이 되었고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 있으면 죽는다고 사람들이 소리쳐서 빨래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을 쳤는데, 한참을 달리다 뒤를 돌아다 보니, 용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용이 하늘로 등천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꿈으로 생생하게 보고서 참으로 운수대통할 일이구나 생각하였다는데, 내심 이는 필시 아들을 낳을 징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마지막 세 번째 꿈은 그로부터 3개월 후라고 하는데, 그때는 어머니께서 등민산이라는 고향 뒷산으로 하얀 대바구니를 들고 나물을 캐러 갔다는 것이다. 그 산은 진달래 꽃들이 많이 피어 있었고 산나물도 많이 있었는데, 꿈에서는 나물이 잘 안보이고 봉우리에는 하얀 안개만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그 안개 속으로 한발을 성큼 디뎠는데, 느닷없이 작은 송아지 새끼만한 동아뱀이 발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어머니를 등에 업고 하늘로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어머니께서는 무섭고 어지러워서 눈을 못 뜰 지경이었다고 하는데 동아뱀에게 “나는 하늘에 오르면 신선이 되겠지오만, 부모양친, 남편과 어린 것들은 누가 보양하겠습니까. 용님, 나를 인도 환생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빌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 동아뱀이 다시 술술술 돌아 땅에 내려 놓았고, 이와 함께 꿈을 깼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꿈이 하도 신기해서, 꿈을 잘 푸는 사람을 찾아가 해몽을 부탁드렸는데, 해몽가가 어머니께 말하기를 “당신이 바라고 있는 아이는 아들은 아니고 딸이 분명한데, 여식이라도 크게 될 사람을 낳을 것이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실망을 하셔서 무슨 근거로 그런 해몽이 나왔냐고 묻자, 해몽가가 대답하기를 대바구니 들고 산에 나물 캐러 간 것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는 것이요, 용이 등천한 것은 여자라도 큰 일꾼이 될 것이라는 해몽이었고, 원님이 부임하는 꿈은 진주대나무에 걸친 빛나는 가정으로는 시집가지 못하고, 소리나는 예술이나 글공부를 하면 크게 될 거라고 풀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러니까 1921년 2월6일.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어머니께서 내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라서 섭섭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지만, 해몽가의 말마따나 딸이라도 큰 사람이 된다고 하니 그나마 안위를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낳고 세 살 나던 해부터 한문 서당에 보내어 글을 배우게 하셨는데, 4~5세 난 아이들보다도 더 글을 빨리 배우고, 말도 잘해서 선생님의 귀염을 독차지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공부를 시킬 작정으로 일찍부터 서당에 보냈다고 하는데 만약 내가 국악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시 태몽이니 뭐니하는 꿈이야기를 해보았다. 사실 사람이 좀 이름이 나고 유명해지면, 으레 이 태몽이란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색도 되고 조금 과장되어 와전될 수 있다.
꿈,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지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그 때 당시 꾸었던 꿈이 지금도 생시같이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잠깐 써 보았다.

 

세 살 때 서당에 들어가서

요즘 신세대 젊은 부모들, 혹은 주부들 사이에서 영재교육이니 조기 교육이니 하는 것이 유행한다고 한다.
자기 자식을 어렸을 때부터 잘 공부시켜, 남보다 더 잘나고 훌륭해지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출발했음직한 이 조기교육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지만, 단편적으로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끝이 없음을 보여 주는 모습일 것이다.
사실 어떤 부모든지 자기 자식이 훌륭해지고,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죽하면, 옛성현의 글귀에 “입신행동하여 양명어후세하면 효지종야(入身行道 揚名於後世 孝之終也:입신하여,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라고 했을까.
어쨌거나, 나는 참으로 욕심 많은 어머님 덕택에 요즘 말로 치면 조기교육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세 살 때 서당을 보내셨다. 그래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동몽선습 등을 떼었다. 서당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였고, 더군다나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따라서 나는 서당 선생님의 귀여움을 혼자서 독차지했는데, 덕분에 친구들의 질투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이 조기교육은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가히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아녀자는 살림만 잘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살았던 세상이었고, 여자가 공부를 해서 똑똑해지면 못쓴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아닌가. 그러한 시절에 세 살 밖에 안 된 계집아이를 서당에 넣어 교육을 시켰으니, 우리 어머니의 욕심도 어지간한 분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나의 유년 시절에 서당 글공부는 훗날 내가 판소리 수업을 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었다.
아시다시피, 판소리의 사설 대부분이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무슨 책이나 악보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질 않았다. 기껏해야 한 대목씩 선생님께서 선창을 해주시면 그걸 듣고 따라 외고 불러야 했다. 이른바 이러한 교육법을 ‘구전심수(口傳心授)’라고 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자칫 발음이나, 뜻을 잘못 이해하고 배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더군다나, 판소리는 고향이 전라도인지라, 사투리까지 곁들여져 있으니 타지방 사람들은 여간해서 접근하기 힘든 소리가 바로 판소리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한문 실력 덕택으로, 판소리 수업을 받으면서도 뜻과 음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능적저고리 입고 뛰놀던 시절

여자아이를, 그것도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배우게 한 어머니의 욕심은 분명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이 조기교육은 외가 쪽의 영향도 상당했다.
그 때 당시에 나의 외조부님은 인근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었는데 이러한 환경은 나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당에 입학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면서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기억 외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당시에 서당에 다니던 학동들은 나보다 두서너살 위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아이들보다도 글을 빨리 배우고 말도 잘해서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특히 ‘검을 현(玄)’자를 잘 썼다고 선생님께 상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던 사내아이들이 질투하여 미움을 사기도 했던 생각이 난다.
한번은 같이 공부하던  아이 중에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았던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먹던 쌀밥을 어머니 몰래 갖다 주고, 나는 그 친구가 먹던 밥을 먹곤 했었다. 그 당시 그 친구의 밥은 콩잎에 비빈 보리밥이었는데, 어린 마음에 쌀밥보다도 그게 더 먹고 싶었던 것 같다.
십수년 전인가 정말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해, 그때 서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을 만났는데, 어떤 친구들은 아들 딸 자식 낳고 농사지으며 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고향동네인 가산에서 면장 노릇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세월무상의 옛생각이 저절로 떠올라 며칠동안 참으로 즐겁게 지내다 온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의 나의 아명은 영심이라고 앞서 말했지만, 또다른 아호가 하나 있다. 그것은 ‘노미’라는 이름인데, 이 이름은 ‘놈’에서 온 말로, 아마 아들을 보고 싶어했던 부모님께서 아쉬움에 붙여준 이름일성 싶다.
노미라는 이름을 가졌던 철 모르던 어린 시절에 나는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냇가로 놀려다녔던 기억이 난다. 우리 고향 동네 바로 앞에는 큰 냇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냇가에 나가 하루종일 고기를 쫓던 생각이 지금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우리 집은 그때 당시 얼마나 부유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외동딸이라고 그랬는지, 그때 당시에 시골 농촌아이들이 입을 수 없었던 연분홍 능적저고리를 입고 다녔었다. 그리고 오빠와 함께 등산에 창꽃을 꺾으러 갔다가 어머니께서 사주신 국화 무늬 꽃고무신을 잃어 버리고 돌아왔다가 야단을 맞고 밤새 울었던 기억도 난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고향은 가야산의 줄기를 끼고 도는 동네이다. 인근에는 실라 내물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송림사(松林寺)등, 많은 절이 있고, 조선조 인조때 축성된 가산산성(伽山山城)이 있어 어린 아이들이 뛰노는데, 눈요기 거리가 많은 곳이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술지게미를 먹고 온집안을 뒤집어 놓은 기억이 난다.
철 모르던 어린 시절, 외동딸로 자라나다 보니까 버릇도 없고, 천방지축 장난꾸러기였던 나는, 어느 날 곳간에 몰래 들어가게 되었다.
시골 곳간이 대개가 그렇지만, 참으로 많은 물건들이 숨겨져 있는 곳이 아닌가. 그중에서 나의 눈에 띈 것은 시큼한 냄새가 풍기는 항아리였다. 그건 바로 술지게미를 담가놓은 술독이었다.
나는 내 키보다 높은 항아리에서 술을 푸기 위해 툇침을 받치고 그 위에 섰다. 그리고 항아리 뚜껑을 열고 바가지로 술지게미를 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찔하다. 그러다가 그 큰 항아리에 빠지기라도 했으면 어찌 되었겠는가. 아무튼 나는 술지게미를 바가지로 퍼서 부엌으로 내달음을 쳤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설탕을 한숟갈 타서 먹었다. 그 다음은 어찌되겠는가. 얼굴은 뻘겋게 달아 오르고, 다리는 휘청 휘청...
영문을 모르는 집안 식구들은 내 얼굴을 보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가, 니 얼굴이 와그러노, 니 어디 아프나. 아니 애 좀 보라카이. 다리가 휘청거리고. 아가, 정신차려라이.”
“엄니, 나도 우에 그러는지 잘 모르겠십니더. 머리가 빙빙 돌고예, 어지러워 죽겠십니더.”
“니, 낮에 뭘 묵었나. 얘가 혹시 뭘 잘못 묵고 체한거 아냐?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꼬? 이거 술냄새 아닝교. 니 술먹었나? 얘좀 봐라카이. 얘 누가 너에게 술을 묵였노? 응?”
어머니의 닦달에 나는 한사코 고개를 휘저었고, 결국 뒤늦게 술지게미를 먹은 사실이 알려져 어른들에 무척이나 혼이 났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께서 “쟤는 큰일 낼 애데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커야 했다.
또 언젠가는 외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어린 소견에 할머니께 맛있는 것을 해드리고 싶어서 집 앞에 있는 냇가에 나갔다.
졸졸거리며 흐르는 맑은 물속에서 피라미 새끼들이 햇빛에 비늘을 반짝이며 헤엄치고 있길래, 그걸 잡아서 볶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피라미를 잡았다.
그러나 하루종일 잡은 피라미는 겨우 몇 마리. 그걸 꽃고무신에 담아 갖고 와서는 국을 끓였는데, 간장을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 짜서 못 먹을 정도여서 무척이나 속이 상해서 엉엉 울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나의 마음이 참으로 기특해서였는지 그것을 잡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얘야, 울지 마라카이. 참말로 맛있데이. 내 생전 이렇게 맛난 국은 첨 먹어본다. 원 녀석도 울지 말라니까.”
나는 그말을 듣고 뭐가 서러웠는지 더욱 엉엉 소리내어 울었고 할머니는 나를 꼬옥 껴안아 주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가다가 그 할머니의 품속이 그리워진다. 어린 시절. 그것은 분명, 누구라도 돌아 가고 싶은 추억의 시절일 것이다.
나이가 먹어서인지, 지금 그 어린 시절에 고향집 고샅길을 줄달음치면서 뛰놀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나이가 먹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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