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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2022-10-01 16:20
작성자 Level 10

2.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


대구공립학교에 입학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던 그 다음 해인 여덟살 때, 나는 정든 고향인 칠곡군 가산면을 떠나 외가가 있는 대구 봉산동으로 옮겼다.
대구는 나의 고향인 칠곡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곳이었다. 외가집으로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님의 교육열 때문이었다.
봉산동 외가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지금도 대구의 명물로 남아 있는 약전 골목의 약령시장이 있었다. 약령시장은 해마다 음력 2월과 10월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약을 사러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참으로 볼 만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 아이들은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던 때였지만,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약령시장을 구경하러 다녔다.
지금의 중아 파출소에서 종로에 이르기까지 인산인해를 이룬 대구 약령시는 갓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전국에서 몰려 들면 정말 장관이었다.
이 때를 놓칠세라 대구 상인들은 포장을 치고 즉석가게를 놓고 음식 장사같은 것을 했는데, 나는 이런 것들이 재미나고 신기해서 매일같이 약령시장에 나가 구경을 다니곤 했다.
시골에서 동무들과 뛰놀던 말괄량이 선머슴같은 기질은 여전했던지, 지금의 대구 중심가인 중앙통에서 댕기머리를 땋고 친구들과 저녁 늦게까지 놀곤 하였다. 주로 놀던 놀이는 친구들과줄넘기나 고무줄 놀이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무척이나 줄넘기를 잘했었다.
또 공이 없어서 차돌들 가지고 지금의 야구와 비슷한 놀이를 하다가 남의 집 간장단지를 깨뜨려서 장독값을 물어 준 기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아홉 살 땐가 열 살 땐가 서울 친척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서 서울 구경 한 번 오는 것은 요즘 말로 해외여행 해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튼 말로만 듣던 서울에 와서 이리 저리 구경을 다니다가 화신 백화점을 가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난생 처음 에스컬레이터라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나는 문명의 이기라고는 전혀 모르고 지냈었는데, 계단 층층이로 사람을 싣고 저절로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라는 것을 봤으니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났겠는가. 나는 그날 백화점 구경은 뒤로 하고 계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놀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나는 아침밥만 먹으면 화신 백화점으로 달려가 하루종일 에스칼레이터를 타곤 했다. 그 때 당시 친척집은 청진동이었는데, 청진동에서 화신백화점까지 매일같이 달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재미로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대구 촌년이 서울에 처음 올라와보니 에스컬레이터에 혼이 빠져 화신백화점을 매일같이 들락거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절로 난다.
나는 여덟 살 나던 때, 지금의 대구국민학교인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대구는 경성(서울)과 부산 다음으로 큰 대도시였던 관계로 나는 신식교육을 받는다는 설레임보다도 큰 도회지에 나와서 산다는 기쁨이 더 컸었다. 학교 생활도 재미있었고, 특히 산수와 작문 시간은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에는 작문 시간에 ‘한밤중의 불종소리’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교내에서 특상으로 뽑혀 상을 받기도 했다. 한밤중에 잠을 자다가 이웃에 불이 나서 당황하는 모습을 그렸던 이 작문은 내 생에에 있어서 공식적으로 받은 최초의 상이 아닌가 싶다.
학교 성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으니 고 d부는 꽤나 잘했나보다. 아마 학교 성적이 좋았던 이유는 과거에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며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뗀 경험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시문(時文) 등을 읽은 경험 때문이었는지 작문에서는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 같다.


 

처음 본 무성 영화

어린 시절, 대구에서 자라면서 학교 공부에 여념이 없던 나에게 보통학교 3학년이 되면서 새로운 문화와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외숙모집 근처에 있는 만경관이라는 극장에서 무성 영화를 보게 되면서였다.
당시 기억으로는 입장료가 5전인가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참으로 별스러운 세계가 다 있구나’ 하는 생가기 오랫동안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히 문화적인 충격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열두서넛 나이에 처음으로 본 영화였으니 어찌 충격적이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제목조차 희미하지만, 변사가 갖은 목소리를 다 내면서 주인공들의 심정을 연기하는 영화를 보고 나는 무척이나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부터 나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영화 속에서 본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마 나의 예술 세계에 대한 동경은 이때부터 시작이었지 않았나 싶다.
당시 일제는 3·1 운동을 거치면서 문화 정책을 쓰던 때라 서울에서는 서 대문의 동양극장이 들어섰고, 코리아나 호텔 옆의 부민관, 을지로의 황금좌 극장 등이 들어섰다. 부산 대구 지역에서도 앞다투어 극장이 생겨나면서 무성영화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또 이 같은 영화 뿐만 아니라, 극장을 무대로 판소리와 창극(唱劇) 공연이 인기를 끌면서 당시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은 그 설움을 오락으로 충족하던 시기였다.
물론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국악의 국자도 몰랐던 시절이었지만, 우리의 대선배님이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의 대가 송만갑 선생은 춘향가와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전국을 돌면서 한창 인기를 날리던 시절이었고, 당시 내로라하는 조선의 명창들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던 시기였다.
특히 판소리의 명인 이동백 선생은 서울 원각사에서 춘향전과 심청전의 창극에서 주연을 맡아 인기 절정을 누리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다시 한번 음악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공연을 보게 되었다.
나의 외숙모는 국악을 꽤나 좋아하셨는데, 어느 날인가 어린 나를 이끌고 대구극장에서 열리는 조선성악연구회의 공연을 구경하게 었다.
당시 조 선성악연구회는 송만갑,이동백,정정렬,김창환,김창룡,박록주,오태석,정남희 등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명인 명창들이 재기를 뽐내던 때였다.
공연 중간쯤에서는 가야금 병창을 하시는 오태석 선생이 심청이 인당수로 끌려가는 대목을 하였다. 옆에 손수건을 놓고서 눈물을 닦아가면서 소리를 하는데, 어찌나 잘하던지 관객들에게 재창 삼창 오창을 받는 광경을 보고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하긴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겠는가마는, 어린 마음에서도 바로 이것이 예술이고 음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태석 선생님은 훗날 나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해 주신 분이었는데, 외숙모 손에 이끌려 구경왔던 보통학교 4학년 어린 소녀가 나중에 당신의 제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손광재 선생 눈에 띄어

가끔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떤 인연으로 국악을 하게 되셨는지요?”
내가 국악을 시작하게 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 운명적인 인연 탓이 아닌가 싶다.
국악과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것은 보통학교 4학년때 쯤으로 기억된다. 집에서 학교를 오가는 길에 매일 정오 사이렌이 울리던 오포동 옆자리 쯤에 국악 교습소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나를 국악의 길로 이끈 손광재(孫光在) 동기(童妓)를 가르치던 국악 전수소였다.
당시 대구에는 국악을 가르치던 전수소(傳修所)가 2~3개 정도가 있었는데, 어린 나는 학교 길을 오가다가 문득 담을 타고 흘러 나오는 소리에 심취해 발길을 번번히 멈추곤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흘러나온 흥겨운 가락은 신기하리 만큼 나의 귀를 솔깃하게 하였고,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러기를 여러날, 학교를 오가다가도 그곳 담벼락에 귀를 묻고 귀동냥으로 소리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학교는 매일같이 지각하기 일쑤였고, 소리에 빠져 결석도 자주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소리에 혼이 빠져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귀동냥을 하면서 따라 불렀던 소리는 단가 ‘산악이 잠형하고’와 ‘만고강산 유람할제’였다.
나는 담 너머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나지막히 따라 부르면서 학교길을 오가다가 담벼락에 기대어 단가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악 전수소 주위를 계속 기웃거렸다.
그렇게 귀동냥으로 시작한 소리공부는 점차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담벼락 아래서 큰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리를 배운지 한 6개월 정도 되었을까.
어느날인가, 전수소의 소리 선생인 듯한 분이 담벼락 아래서 소리를 따라 부르는 나를 발견하고 신기한 듯이 말씀하셨다.
“어허, 네가 소리 공부를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런데 얘야, 소리 공부라는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다.”
그 분은 바로 손광재(孫光在)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척이나 소리를 배우고 싶었고, 다른 아이들이 부르던 소리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저, 그동안 지가 등너머로 조금 배웠는데예, 자신 있습니더. 한번 들어 보실랍니꺼?”
선생은 나의 말에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어허, 그래? 등 너머로 조금 배웠다고? 이거 그러고 보니 조그만 녀석이 도둑수강했네그려. 허허허. 그래, 그럼 한번 해보거라.”
나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산악이 잠형하고’를 불렀다.
“산악이 잠형하고, 음풍이 노호한데, 수면에 우는 소리 천병만마 서로 맞어 철기도창 이었난데······”
나는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를 부른다는 부끄러움에 선생 앞에 어색하게 나섰지만, 그동안 몰래 숨어서 배운 소리를 신명나게 불러 제꼈다.
그러자 손광재 선생은 나에게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래 쓰것다, 너 소리 배워라.”
이 한마디는 나의 인생을 바꿔 놓는 중요한 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학교가 파하면 곧장 전수소에 가서, 소리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국악 인생, 그리고 소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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