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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6. 우리 가락에 취해서2022-10-01 16:25
작성자 Level 10

16. 우리 가락에 취해서

 

나의 국악 사랑


 나에게 있어서 국악이란 무엇일까.
 흔한 말로 예술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팔자소관이라고들 하는데, 정말 예술이 팔자소관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물론 천부적인 끼도 있어야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갖기 위해서는 무던히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 없이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는 열 네 살 어린 시절,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우리의 흥겨운 가락에 길을 멈추고 흠뻑 빠지기 시작했다. 그 뒤 시간만 나면, 몰래 빠져나와 담 밖에서 우리가락의 멋과 흥에 사로잡혀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완고한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 국악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집안 식구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나의 예술에 대한 열의가 약했던 것은 아니다. 나이 열 다섯 철모르던 시절에 박지홍 선생 문하에서 창악 공부를 시작했고, 다음에 강태홍 선생 문하에서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그리고 조학진, 유성준, 박동실, 이기권 선생 등을 거치면서 나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엇고, 창극 무대에도 섰다.
 창극 ‘추풍감별곡’의 취향역은 나의 첫 번째 창극무대였다. 그 이후 계속 남강풍운, 일목장군,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 쌍동왕자, 햇님달님, 선화공주, 호동왕자, 가야금의 유래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스무 살 무렵에는 ‘동일 창극단’을 창설했고, 그 뒤 ‘여성 국악 동호회’를 만들어 이땅에 여성 국극을 처음으로 시도했었고, 전쟁 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 국악 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국악인의 복지 및 국악 발전을 위해 힘을 모았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다.
 일본에 한국 무악원을 창설하여 민족의 정서를 재일교포와 2세들에게 심었다.
 또 한국 예술을 세계 만방에 소개하기 위해 한국 예술단원을 이끌고 순회공연을 수 차례 가졌다. 해외공연을 마칠 때 마다 나는 우리의 조상님에게 감사들 드리고 싶었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 전통 예술에 대한 높은 평가와 아울러 대접을 받았다. 이는 우리가 잘해서만이 아니고, 우리 전통 예술이 그만큼 훌륭하고 대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좋아서 시작하고 그 일을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나의 국악 사랑도 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는지, 68년도에 ‘중요 무형 문화재 23호’로 지정 받았다. 그리고 상복도 있었는지, 73년에 국민 훈장 동백장을 수여 받았고, 77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83년에는 사회교육문화상을, 그리고 지난 89년에는 국민 훈장 모란장을 수여 받았다.
 물론, 결코 상을 받기 위한 그동안의 노력은 아니었다. 어쩌면 국악이 발전해야만이 나도 잘될 거라는 막연한 욕심에서 그렇게 뛰어다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국악이, 우리의 조상의 얼과 핏줄이 스며 있는 우리 국악이 우리들로부터 천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 사대주의 사상의 잔재와, 일제 식민지 정책이 휩쓸고 간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서구의 물질 문명이 홍수처럼 쇄도해서 우리의 저통 예술이 방향 감각을 잃고 정작 대접 받아야 할 우리의 국악은 천대받아 왔다.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가 자기의 민족 예술을 천대하고 매장하였던가.
 세계 그 어떤 나라가 남의 나라 음악을 ‘음악’이라고 하고 자기 나라의 민족음악을 ‘국악’이라고 호칭하였던가.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이건 바뀌어야 한다. 서양음악은 ‘양음악’으로 우리 저통 음악은 그냥 ‘음악’으로 말이다.
 나는 요즘 중앙대에 출강 중인데, 그 학교를 가면 기분 좋은 일이 있다. 그것은 몇몇 뜻있는 교수들의 추진으로 몇 년전에 국악과를 한국음악과로 개칭을 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우리 국악은 더욱 발전해야 하고, 전통은 계승되어야 한다. 국악을 오랫동안 쫓아다닌 나로서는, 이 나이가 되어서 내가 국악을 했다는 것에 보람과 자랑을 느낀다.
 나에게 있어서 국악은 사랑과 종교이다.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 놓으면 모든 번거로움이 사라지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는 기분을 느낀다.
 나는 우리 가락에 취하여 있고 내일도 취할 것이다.


 우리 음악의 뿌리를 위하여


 국악은 우리의 멋이다. 나의 멋일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멋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핏줄에 젖어 내려오는 가락은 국악 뿐이다.
 그래서 국악은 우리의 멋일 수밖에 없다.
 예부터 달빛에 명주실처럼 펼쳐져 전해오는 우리 민족의 가락은, 선조 대대로 깊은 생활 속에 녹아서 전해 내려왔다.
 이 생활의 멋진 가락 속에는 때로 민초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우리들의 슬픔과 기쁨, 한숨과 괴로움의 한, 이 모든 것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국악은 쉽게 누구나 친해질 수 있고, 가까워질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정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중하고 받들어야 할 우리의 민족음악, 우리의 국악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더러 있다. 우리가 우리고유의 전통 예술을 보살펴 주지 않으면 누가 우리 국악을 돌본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일인 것이다.
 많은 외국 사람들은 우리 고유의 예술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우리들은 외국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기를 원하는가. 음악을 원할 때 국악을 들려주어야 할 것이고 미술을 원할 때는 유형 문화재를 감상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날아갈듯한 기와집의 처마며 아름다운 무늬의 단청빛, 레오날드 다빈치의 그림 못지않은 우리의 불교 예술의 선의 세계와 은근한 미륵불의 미소. 이 모든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건축예술이 발달한 로마에 가서도, 불국사의 날아갈 듯한 추녀선의 미학은 찾을 길이 없듯이 우리의 민족 예술은 독특함이 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그 나라 그 민족의 예술을 보고 싶어 한다.
 이러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악은 너무나 소외되어 있다.
 평생을 고생과 눈물 속에서 국악에 몸바쳐 온 우리 국악인들은 오직 우리의 고유 음악인 국악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악은 국악인 것만이 아니다. 온 국민이 모두 국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국악을 생활 속에 심어 가꿔야 한다. 그래야만이 우리의 멋과 가락은 절로 세계 속에 꽃이 필 것이다.
 그렇다고 양악을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양악이 국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양악을 받아들이되, 우리 민족의 문화 양식에 맞게 순화시켜야 할 줄 안다. 양악과 국악을 비교할 때 반드시 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것이 국악이다.
 국악을 기본으로 양악을 맞게 제작하여야 민족의 긍지가 살아날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은 양악 그 자체가 국악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악을 찾아서


 국악은 민족 정신의 산물이라 하여 일제 시대에 많은 학대와 억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것을 찾고 국민 주체의식을 높힐 때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음악을 이해하는 데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애국의 길이 되는 것이다.
 국악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황홀한 선율에 도취되기 일쑤이다.
 관악기이건 현악기이건 소리의 가락에 조용히 젖어 들지 않는 사람은 아마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고구려의 국상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할 때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잇다. 그리고 신라 20대 자비왕 때 백결선생은 가세가 궁색하여 명절에 거문고로 절구질 소리를 가락으로 나타내어 세상에 유명한 ‘방아타령’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가야금의 애절한 가락이 우리의 마음을 종횡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음악의 그치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또 인간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판소리는 우리들의 심금을 얼마나 흔들어 주는가.
 티없이 맑고 백옥같이 하얀 쟁반 위에 구슬이 굴러가듯 울려 퍼지는 소리는 정말 그 맛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또한 우리의 고전 무용은 그 선이 섬세하기가 한 폭의 그림이요, 선녀들이 노는 듯 우아하고 화려하기만 하다.
 참으로 국악은 생각만 하여도 즐겁기만 하다. 국악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황홀한 세계로 젖어 들게 한다. 보는 것만 아니라 듣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한껏 즐거워질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생활과 상상력에 친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국악을 찾아서 평생을 좇아다닌 나는, 후회라기보다는 보람에 살고 있다. 창을 할 때나 가야금을 연주할 때나, 나는 모든 세상의 번거로움을 잊을 수가 있다. 일찍이 선배 스승에게 가야금과 창을 배울 때도 나는 이것이 좋아서 시작했다.
 창극을 할 때는 더욱 즐거웠다.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는 그만큼 괴로움도 컸지만, 이 괴로움이란 국악에 뛰어 들어서 진정 보람을 찾아 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옛날을 돌이켜 보면, 나라고 어찌 괴로움이 없을까만 그 괴로움은 한낱 티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래서 나는 국악을 찾아 나섰던 것일까.
 아직도 가야금 앞에 다소곳이 앉으면 나비처럼 내마음은 훨훨 날아 갈 듯하고, 이 즐거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국악인이 느끼는 즐거움이자 국악을 즐기는 대중들의 즐거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멋의 예술

 
 나는 우리의 가락을 위하여 산다. 아니 살아왔다. 또 앞으로도 쉬지 않고 우리 가락을 위하여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락 속에는 흥이 있고 멋이 있어서 좋다. 이 흥과 멋이 넘쳐 흐르지 않았다면, 벌써 나는 다른 길로 전향해서 엉뚱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평범한 삶도 제 나름대로 다 뜻이 있고 멋이 있겠지만, 일지기 나는 그런 여자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은 가야금을 떠나 살아갈 도리가 없게 되었다.
 “가야금아. 수십년 동안 애환을 함께 해 온 가야금아. 너는 나의 마음을 알아 주겠지. 왜 내가 평범한 시골 아낙네가 되지 못하고 너와 더불어 평생을 같이 살아가고 있는가를”
 가야금 병창은 내 몸을 불사르는 듯한 희열을 느끼게 한다. 내가 손수 가야금을 뜯으며 소리를 할 때나, 내 선배 내 동료들이 나와 같이 가야금을 연주할 때나, 또한 내가 아끼는 제자들이 가야금 앞에서 창을 하며 연주를 할 때 비로소 내가 살아가는 보람을 느낀다. 이래서 나는 더욱 가야금을 멀리할 수가 없다.
 정말 우리 가락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신념이 아니다. 더욱이 외국 공연에 나가보면 자신감과 긍지를 느낀다.
 외국에서의 우리 국악의 인기는 대단하다. 국악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외국인들이 더 열광적으로 좋아한데서야 말이 되겠는가.
 물론 공연 당시 특수한 사정과 즉흥적인 취흥 때문에 우레같은 박수를 보내는 점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음악을 전공한 외국 평론가들이 우리 민족 예술을 극구 찬양하는 것은 그만큼 예술로서 고귀한 품위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우리 것’을 위하여 우리들은 눈을 돌릴 때가 왔다. 지금부터 우리 국악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고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다같이 예술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국악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간혹 보았다. 이래서는 안될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란 말이 있다. 우리 국악이 세계적인 음악 예술이란 것을 나는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말은 우물안인 국내에 있는 사람들은 곧이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물 밖인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의 ‘멋의 예술’인 국악의 진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고 표현해야 할까.
 국악은 마땅히 전통 예술과 함께 길이 보존 되고 널리 보급 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민족의 자랑

 민족의 자랑은 예술을 통해 널리 보급된다. 예술이야말로 인간을 설득시키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예술 중에서도 음악은 인류의 ‘공통언어’이다. 이 공통언어가 가장 민족적인 언어로써 세게 인류의 가슴을 지배할 수 있다면, 그 민족은 우월한 민족에 속한다. 우월한 민족의 독특한 예술은 다른 민족의 문화 영역을 침범하고 정신을 빼앗을 수가 있다. 민족과 민족기리 서로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뿐이다.
 아무리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이 상실 된다 하더라도 그 나라의 고유한 전통 예술을 뺏기란 무척이나 힘들다고 한다. 즉, 한 나라에 예술을 통한 문화적 정신이 국민들에게 남아 있다면 그 나라는 남에게서 영원히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우리도 이미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경험한 바가 있지 않는가.
 예술은 시대의 표현이요, 그 나라가 민족의 얼을 담는 그릇이다. 이 그릇을 지배하려면, 짧게는 1세기, 길게는 1천년도 모자랄 것이다.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했지만, 그 우아하고 정교한 백제 예술은 오늘날 신라 예술 못지 않게 평가받고 있다. 고구려가 신라에게 멸망했지만, 역시 고구려 문화의 가치는 남아 있고, 백제 예술과 같이 일본에서 빛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예술의 생명은 민족과 인류를 초월해서 존재한다.
 국가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예술이다. 우리의 민족음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한국적인 음악은 국악예술을 발판 삼아 세계에 뿌리 뻗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예술이 아닌 양악이나 다른 나라의 음악은 얼마든지 그 나라에 가면 보고 들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은 전통 예술, 민족 예술인 것이다. 우리의 국악을 장려해야만이 우리나라의 음악이 세계에 빛날 것이다.
 국악인은 그래서 후진들을 양성해야 하고, 전통 예술을 온 국민이 다 같이 사랑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어디를 가든 양악이 판을 치는 시대는 절대 안된다. 국악이 전멸한다고 하자. 그래도 양악이 국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악을 사랑하고 기린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 정신을 기리는 것이 된다.
 우리 가락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이어준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의 일면을 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작업에 들어선 국악인들은 스스로 긍지를 갖고 힘차게 참여해야 한다. 국악의 즐거움은 곧 ‘민족혼’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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