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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5. 내게 소중한 것들2022-10-01 16:25
작성자 Level 10

15. 내게 소중한 것들


 나의 어머니와 아이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70여 년의 삶이, 단 며칠 사이에 훌쩍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또 지난날 고생하면서 살았던 일들이 마치 추억어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간간히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세월은 유수라는 말이 나온 것일까.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내가 몰래 소리공부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이나 놀라시면서 끝까지 반대 했었다. 그러나 나의 억척같은 고집을 이기지는 못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딸에게 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어머니는 내가 여자이지만 공부를 시켜 큰 인물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내가 소리에 빠져 어머니의 뜻에 어긋나는 길을 걷게 되자 어머니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실망하시기도 했었다.
 이 덕분에 나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나는 어머니의 성을 따서 주민등록상 오계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아버지와 헤어져 대구 외갓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여류명창이 되어서 이름도 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려고 소리공부에 매달렸다. 철모르던 어린 나이에 창극무대에서 억척스럽게 목이 쉬도록 소리에 전념해왔던 것도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소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스무살이 채 되기도 전에 명창이란 칭호가 붙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님의 공덕이 컸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열심히 절에 나가 불공을 드리면서 대성해 주길 바랬다.
 “귀희야, 아가. 니가 정말 내 딸이꼬?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지체 있는 딸을 낳았을꼬. 니 참말로 귀희 맞제.”
 변호사나 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딸이 창극무대에서 곱게 차려 입은 광경을 보고 감격해 하시던 어머니.
 이러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나는 창극무대에서 모았던 돈을 다달이 어머니에게 송금해 드렸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대전 인근에 과수원도 샀었고, 내집 한칸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실 당시 땅과 집을 살 때만 해도 나는 나이가 어리고 무척이나 바빴던 탓에 이재에 신경을 쓸만한 정신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내가 다달이 송금해 준 돈을 모아서, 당시에 유성온천 근처에 2~3백원씩 하던 땅을 샀다. 물론 이 땅은 현재 국악예술고를 지으면서 모두 헌납해버렸지만, 당시 어머니께서 딸에게 장래의 일을 생각해서 땅을 사놓으라고 권유해서였는데, 결과적으로 어머니의 예상이 그대로 맞아서 무척이나 고마움을 느낀다. 딸에게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쳐 줬다고나 할까.
 또 운니동의 운당여관(물론 그당시에는 여관할 생각이 전혀 아니었다)의 경우 당시에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大覺寺) 옆의 한옥집에 살다가 집을 넓혀 볼 요량으로 어머니와 의논해서 산 것인데, 이 운당여관이 이번에 국악예술고를 신축하는데 큰 효자 노릇을 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머니는 내가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부터 줄곧 모셔왔다. 그리고 윤길병씨와 재혼 후, 시어머님도 함께 모셔왔는데, 두 분 다 내가 운영하던 운당여관에서 돌아가셨다.
 가슴 아팠던 일은 어머니께서 독실한 불자로 절에 다니셨는데, 가는 길이 멀어 남들처럼 자가용 타고 절에 가는 것이 소원이셨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을 들어 드리기도 전에 어머니께서는 세상을 뜨고 마셨다.
 나는 이러한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그 뒤에 사는 형편이 넉넉해졌어도 10여년 동안 자가용없이 지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한번은 중학교 다니는 둘째 아들 원철이 때문에 어머니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태형이와 원철이 두 아들이 있는데, 앞에서 밝혔듯이 내가 첫 결혼에 실패하고 두 아들을 어머니께서 거의 맡다시피 하고 길러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들에게 새 양복을 사주었는데, 이 녀석이 나가서 장난을 하다가 양복에 구멍을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머니께서 광목으로 얼키설키 기워서 입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새 양복으로 광목으로 기운 어머니께 한 마디 하였다.
 “어머니 이게 뭐에요. 내 아들을 거지로 만들거요?”
 그런데 무심코 던진 이 말이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화가 나셔서 대구에 있는 큰 아들 집으로 훌쩍 내려가셔버렸고, 한동안 소식 한 장 전해주질 않았다. 그렇게 떠난 어머니를 다시 서울로 모셔오느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는 어머니 마음 상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나의 두 아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건너가 유학을 마치고 눌러 앉아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다.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모두 다니러 와서, 이제는 말년을 좀 편히 사시라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은데, 나 혼자 편하자고 하던 일을 내동댕이 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번에 나의 전재산을 학교에 기부하기로 작정하고 고국에 들어온 두 아들을 불러 놓고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너희들에게 물려줄 유산이 하나도 없다. 지금 있는 재산은 모두 후진을 위해서 내놓을 작정인데 어떻게 생각하냐.”
 “어머님 뜻대로 하십시오. 저희들은 그 어머님의 국악 사랑하는 마음이 천금보다 더 귀중한 유산일 뿐입니다.”
 나는 두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이제 두 아들도 외국에 나가 있고, 어머니와 남편도 세상을 떠나 쓸쓸하고 외로울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요즘도 나는 한가로이 지낼 형편이 못된다.
 국악 전수소를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쳐야지, 또 후학들을 위해 신경쓰다 보면, 하루 24시간도 모자란다.
 칠순이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야 할 터인데도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바빠야 하나?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주어니 일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해야 될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당 선생이 그려준 내 초상화


 운당여관을 처분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정리했다.
 40여년을 살았으니 손때 묻은 물건들도 많고, 그동안 골동품이 되어 버린 물건들도 있었다.
 어떤 것들은 고물상에 팔려 가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동료들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처분하지 않은 몇 가지가 있다. 그것은 몇점의 서화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글공부 하러 서당에 다녔다. 그런데 서당에 가면 서화(書畵)로 꾸며진 스승님들의 방이 멋들어지게 보였던 적이 있다. 어린 생각에도 풍류가 있어 보였고, 그 분위기가 항상 아늑하고 포근했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흔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분야가 어느 것이든지 대부분 외롭고 괴로운 가시밭길을 걷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가시밭길을 걷는 같은 예술인들끼리는 왠지 무엇인가 통하는 데가 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나는 많은 훌륭한 예술인들과 교우를 나누면서 친분을 맺어왔다. 특히 미술인들하고 많은 친분을 쌓아왔는데, 그중에서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정재 최우석 선생을 비롯해서 남농 허건, 금주 이남호, 소송 김정현, 운보 김기창 선생님들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특히 이당 김은호 선생은 나를 언제나 친딸처럼 아껴주시며 귀여워 해주셨고, 늘 칭찬을 해주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당 선생은 조선조 마지막 궁중화가 출신이면서 근대사에서 가장 출중한 대화백이다.
 이당 선생은 어쩌다 틈이 나면, 내 집을 찾아와 나의 가야금 병창을 청하곤 했다. 그럼 내가 정성을 들여 가야금을 타고 소리를 한곡조 하노라면,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천상을 노니는 신선같은 모습으로 가야금과 노래를 감상하시곤 하였다. 그 모습은 마치 나의음악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음악 속에 취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선계의 모습 그것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 분야가 달라도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 때 알았다.
 내가 젊었던 시절, 이당 선생을 자주 뵙던 때만 해도, 이당 선생님의 작품값은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선생의 작품을 한 점 두 점 사서 모았다. 그것은 선생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고, 그림을 좋아하는 천성 탓이기도 했다.
 성격이 치밀하고 욕심이 전혀 없었던 이당 선생은 내가 스물 여덟 해되던 해, 나에게 이런 제의를 해 왔다.
 “어이 박선생, 내 박선생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나.”
 나는 당대의 대화백이시고 명인이신 이당 선생의 제의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선생님, 제 얼굴이 무슨 그림으로 찍어 낼 형상이나 됩니까. 괜히 물감만 낭비하지 마시고 관두세요.”
 “어허, 무슨 말씀을. 박여사는 잠자코 있기나 하시게. 본시 음악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표현 욕구 때문에 음악을 하듯이, 나 역시 그리고 싶은 것을 화폭에 표현하고 싶은 직업을 가진 화가일세.”
 그리고선 이당선생님은 나의 초상화를 완성시켜 주셨다. 당시 선생의 말을 빌리면, 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약 일주일 동안 구상을 하였고,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선생이 그려 준 나의 초상화는 선녀가 천상에서 구름을 탄 모습인데, 선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관세음보살이 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얼굴만 내 모습이지 다른 부분은 범접할 수 없는 기풍과 따스함이 서려 있는 선녀 모습이었다. 나는 너무 맘에 들고 좋아서 사례비 조로 200만원 쯤을 드렸다. 그리고 이당선생이 그려주신 초상화는 오늘까지 두고두고 아끼는 자랑하는 나의 애장품이 되었다.
 이당 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해 전인가, 문든 집에 찾아 오셔서 내실에 걸려 있는 나의 초상화를 감개무량한 듯 바라보시더니, “내가 평생 그린 수많은 초상화 가운데, 단연 제일이야.” 하면서 스스로 탄복하셨다.
 이당 선생은 고종 황제의 어진을 비롯해서, 이순신 장군, 논개, 춘향 등 수 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가운데 나의 초상화가 으뜸이라고 자평을 해주셨으니 그 감격을 어찌 말로 헤아리랴.
 그림을 좋아 했던 탓인지 공연활동으로 그 바쁜 와중에서도, 나는 서른 한 살 되던 해부터 마음 공부를 하느라 3년동안 사군자를 배우기도 했다. 난을 칠 만한 실력까지는 되지 못하지만, 지금은 그저 흉내정도만 내고 있다.
 그동안 자랑할 만한 골동품도 몇 점 모았는데, 신라 토기가 몇 점 있고, 은사이신 김남수 선생님이 쓰시던 가야금,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배우던 김명칠 선생님이 쓰시던 아주 오래된 양금도 소중히 지니고 있다.
 그리고 한가지 빠뜨렸는데, ‘무성극장’이라는 제목으로 된 역대 명창들의 인물 사진첩이 있다. 이 사진첩은 최근 개관을 앞둔 ‘신나라 레코드사’의 사설 국악 박물관에 전시하도록 91년 12월에 기증했다.
 이 사진첩에는 일제 시대 판소리 5명창에 속하던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료과 이들의 소리를 받쳐 주던 명고수 한성준, 정원섭, 그리고 이들에게 소리 공부를 하던 박녹주, 김초향, 김여란, 조몽실, 배설향, 정응민, 이화중선, 오비취, 이중선, 임소향, 전명옥씨 등 내로라 하는 당대 명창들, 또 최근까지 활동을 했던 고 박초월을 비롯, 김소희, 정광수씨의 젊은 시절 얼굴도 실려 있다.
 이 낡은 사진첩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내가 20세 때 전주에 살고 있던 동양화가 겸 서예가 였던 유당(酉堂)이라는 분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지난 40여년 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던 것이다.
 당시에 유당선생은 국악에 심취해 있었는데, 어쩌다가 전주 공연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집으로 초청해서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방 한구석에 스승님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첩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게 주십사 간청을 했더니, 선생은 워낙 아끼서던 물건이었더지라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게 물려주셨던 것이다.
 이 사진첩은 그 후, 아주 소중한 나의 애장품이었는데, 6.25 북새통 속에서도 다른 물건은 모두 제쳐두고 이 사진첩만을 품에 안고 피난길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애장품은 역시 이당 선생이 손수 그려 주신 내 초상화다. 나에게 과분할 정도로 멋들어지게 그려주신 이 한점의 초상화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마련해 준다는 내 기념관에 보존되어 오래오래 전해질 것이다.

 

 요즘 나의 생활


 나이가 들어서일까. 요즘은 차분히 앉아서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바쁘게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반성도 하고, 기도도 드린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시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귀중한 시간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원래는 젊었을 때부터 소리공부 하느라 절에도 드나들게 되면서 오랫동안 부처님을 모셨었고, 또 어머니께서도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불교를 믿었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오랫도록 믿어왔던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어떤 종교든지 그 믿음 아래서 건강하고 솔직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자세는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나를 기독교로 인도하신 분은 서울 녹번동 중앙교회의 박영권씨였다. 그분은 교회에서 장로를 맡아보고 계셨는데, 시조창을 아주 잘하였다. 그 분이 우리 국악예술학교 일을 관계하셨는데, 나에게 교회에 나오도록 권유하셨다.
 그리고 지난 84년 현재 출석 중인 인사동의 승동교회 박일웅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교회에 나가기 전에는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면, 예를 들어 초상집에 다녀오면, 옛날 어머님이 하시던 것처럼 다리미에 불을 태우고 소금을 뿌려서 그것을 타 넘어와야 속이 풀릴 정도로 미신을 지키곤 하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가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지난번에 국악예술고등학교 이전 관계로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며칠을 두고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기도를 통해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나의 모든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정하자 모든 무제가 해결 된 듯이 개운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런 결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다 못해 말년에 생활할 수 있는 약간의 재산은 남겨 놓아야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미련이나 후회는 전혀 하지 않았다.
 이제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는가. 그저 우리 국악을 배우는 후학들에 새로운 시설과 공간에서 좀더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있다.
 최근에는 내가 출석중인 승동교회에서 집사를 맡아 달라는 권유가 들어 왔다. 그러나 교회 일도 일이지만, 나에게는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후진들을 가르치고, 강의나가고 또 우리 국악 중흥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아서 사양했다.
 최근에 들어서 나의 하루 일정이 더 빠듯해졌다. 국악 전수소에는 20여명의 제자들이 있는데, 매일같이 나가서 일일이 지도해야 한다. 그리고 중앙대의 국악 강의도 거를 날이 없다.
 사람이 칠순을 넘기고 나면, 좀 편히 쉬어야 하는데, 아마 이것도 팔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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