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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4. 전 재산을 헌납하고 나니2022-10-01 16:25
작성자 Level 10

14. 전 재산을 헌납하고 나니


국악예술고 준공 테이프를 끊으면서

1992년 12월 11일은 나의 인생사에 있어서 참으로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그날은 바로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의 새 교사가 구로구 시흥동에 완공되어 완공 테이프를 끊은 날이다. 이날 신축 교사 준공식에는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서 여당총재인 김영삼씨, 그리고 많은 인간 문화재와 예술인들이 참석해서 축하해 주었다.
건평 5천평의 대지에 20여개의 실습교실, 인문관, 예술관, 그리고 고맙게도 내 이름을 따서 지은 공연극장인 향사기념관, 1천여명이 수용되는 야외극장까지 예술학교로서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규모로 지어졌다.
이렇게 해서 우리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시흥동 관악산 줄기에서 21세기의 국악요람을 펼치게 된 것이다.
지난 1970년 석관동에 학교를 새로 짓고 이사한지, 꼭 22년 만에 새 교사로 이사하게 되었다.
시흥동에 새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려웠던 시절, 내집 없는 설움을 겪으며 이 동네 저 동네로 쫓겨 다니면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던 시절에서부터, 갖은 고생을 하면서 문화재 관리국 땅을 불하받아 석관동에 내집 마련을 하면서 정착하기 시작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그러나 70년에 입주한 석관동의 국악예술고의 터는 문화재 관리국 땅이었던 관계로 그동안 계속 임대료를 내면서 운영하는 등,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았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학생 수용 능력이 한계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보다 적은 재원으로 어렵게 지은 학교가 되다 보니까, 20여년이 지나면서 학교가 낡고 보수할 곳이 지천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88년도에 학교 동창회의 간부들이 찾아와서 학교 이전에 대해 진지한 상의를 해 왔다.
“선생님, 지금 학교 건물은 무엇보다도 협소할뿐더러 환경적으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동창회 뜻을 모아서라도 학교 이전을 성사 시켰으면 합니다.”
하긴 그런 마음은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는 재원이었다. 요즘처럼 부동산 값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비싼 때에 학교 건물을 지을만한 땅을 구한다는 것도 힘들고, 또 건축비는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물론 여러 가지로 어렵겠지요?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좋아요, 우리 국악예술고가 언제 돈 가지고 시작한 학교입니까. 뜻이 잇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한번 추진해 봅시다.”
나는 사람들에게 일을 벌이는 데는 명수라는 소리를 듣는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를 두고 국악을 잘못 전공하지 않았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이후에 ‘여성국악 동호회’를 조직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여성 국극을 조직하여 나름대로 돈도 많이 모았고, 또 운당여관을 운영하면서 사업적 수완이 좋다는 평판도 들었으니, 혹자는 나를 기업경영자로서 장사쪽으로 나갔으면, 지금쯤 재벌 소리를 들었을지도 몰랐을 거라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긴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나는 대구경상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는데, 아마 나의 경제적 수완은 천성적으로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빠졌는데, 아무튼 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주축으로 한 학교 이전 계획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마침 시흥동 관악산 줄기를 잇는 산등성이에 적당한 대지가 나타났고, 5천여평의 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신축이 욕심과 의욕만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전문가들을 통해서 학교를 짓는 예산을 뽑아보니, 최소한 70여억원이 소요될 청사진이 기다렸다.
70억. 말이 70억이지, 그 많은 돈을 어디서 조달한단 말인가.
곧이어 동창회를 주축으로 한, 학교 건립 추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김재문 동문회장이 위원장이 되어 각계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따라서 나는 모종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30여년간 정이 들었던 운당여관을 처분하게 된 것이다. 운당여관을 처분하니 26억원 정도가 나왔다. 그러나 그것가지고도 어림없었다. 그래서 예전에 사두었던 대전의 과수원을 모두 팔았더니, 8억원 정도가 나왔다.
여기에 석관동 학교를 매각해서 나온 돈 20여억원, 그러니까 총 54억원 정도의 예산이 확보되었다.
내가 이렇게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국악예술고에 헌납하자, 많은 사람들이 큰일을 했다면서 기자들과, 관계 기관 사람들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내가 학교에 재산을 헌납하게 된 것은 나의 공을 세우려고 했던 이유때문도 아니요, 어줍잖은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도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국악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고, 또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생활여건이 나은 내가 당연히 앞장서서 한 일에 불과하다.
어차피 인생은 ‘공수레 공수거’라고 하지 않은가. 나는 지금까지 일생을 살아오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치부를 하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돈이란 아주 요긴한 데에, 꼭 써야 할 곳이라면 아낌없이 써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국극단 시절, 흥행에 성공해 돈을 조금 모아서 산 과수원과,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마련한 운당여관이, 국악예술고를 위해서 이렇게 효자 노릇을 해준 것 뿐이다.
또, 나는 운당여관을 운영해 오면서 나온 수익금과, 일본에 설치한 한국무악워너의 수익금의 거의를 우리 국악예술고 발전을 위해 학교에 헌납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술하면서 남보다 돈을 많이 만지게 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나만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치부는 한 일이 없다.
어느 정도 예산이 확보되자, 학교 건립은 본격적인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91년 8월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에 준공된 국악예고는 5천여평의 대지 위에 1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문관, 예술관, 극장 등 주건물 3개동과 도서실, 향사 기념관 등 부속건물이 지어졌다.
특히 자랑하고 싶은 것은 1천 5백여평의 예술관과 1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인데, 예술관에는 가야금, 피리, 판소리, 민요, 무용 등 실기를 할 수 있는 20여개의 특별 교실과 실습실이 들어섰고, 극장은 앞으로 대외적으로 여러 가지 상설 공연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
이 정도면, 국내 최고의 예수학교로서 손색이 없는 학교라고 자부 할 수 있다.
학교도 준공 되었고 이제 여한이 없다. 욕심이 있다면, 국악만을 전문으로 하는 국악예술대학을 설립하는 것이다. 요원한 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민족의 정기가 살려면, 그 나라의 민족 예술이 발전해야 한다. 특히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숨쉬는 우리 음악을 전승 발전 시켜야 한다.
국악예술대학을 만드는 꿈. 이건 꿈이 아니다. 누군가 만들어야 할 당면한 과제인 것이다.
국악예술고등학교 신축 테이프를 끊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한때는 학교 운영이 어려워 임대료를 낼 돈마저 없어서 나의 사재를 털어서 해결했던 쓰라렸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을까만, 생각해보면 그 때의 고통이 이렇게 오늘에 이르러 열매를 맺지 않았나 싶다.
시흥동에 새로 지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이제 그런 걱정 없이 학생들은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국악예술고의 장래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지난해까지 5천여명의 졸업생을 사회에 배출해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대학의 국악과를 나와서 우리 사회에 저통 음악의 맥을 잇는 주자로 뛰고 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대학의 국악과에 재학중인 학생들 중 우리 학교 출신들만 해도 약 800여명에 이른다. 이들 뿐만 아니고, 대학원에 진출해서 석박사학위를 얻고 대학 강단에서 교편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생들은 해외로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잇다. 물론 이들 모두는 앞으로 우리의 국악을 이끌어 갈 든든한 기둥들임이 틀림없다.
우리 국악예술고등학교는 현재 성악과, 기악과, 무용과의 전공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가운데 성악과는 특히 우리 민속악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를 전문으로 교육하는데, 3년동안 유수의 국내 명창들의 지도 아래, 기초 발성법부터 시작해서 단가와 판소리 다섯마당을 골고루 접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가곡, 가사, 시조는 물론, 민요, 가야금 병창을 전수받게 하고 있다.
또 기악과의 경우,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에게 가야금이나 거문고, 혹은 피리, 대금, 해금 등, 악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토록 해서 집중적으로 공부 시키고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현재 국내외에 사물놀이로 잘 알려진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우리 국악예술고 출신으로 이러한 실기 과정을 엄격하게 교육받은 학생에 속한다. 또 최근에 국악 관현악단이 많이 창단됨에 따라 진로도 많이 좋아졌는데, 졸업 후 국립국악원,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KBS국악관현악단, 중앙국악관현악단 등 여러 관현악단에서 중진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본교 출신들이 많이 있다.
한편 무용과는 재학중 민속 무용의 전반에 걸쳐 무용인의 소양과 자질을 갖추도록 훈련시키는데, 북춤, 장고, 농악, 탈춤 등과 아울러, 현대 무용과 발레 전공도 택할 수 있도록 폭을 넓혀 놓았다.
따라서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생들과 같은 정규 학교 과정을 통해서 전인교육을 실천하고, 이와 더불어 자신의 특기를 살리는 예술교육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국악 인재를 키우는 데에 노력을 아끼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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