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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3. 형님, 원풀렸소!2022-10-01 16:24
작성자 Level 10

13. 형님, 원풀렸소!


국악예술고에 정열을 쏟으며

“고운 산 맑은 물, 금수강산 이 나라에 예의 미풍 노래하니, 문화 민족이 이 아니냐. 박차여라, 나아가세, 어둔 거리에 횃불을 밝혀라. 잃었던 국악을 다시 찾자. 씩씩하고 순결하게 삼천만의 겨레의 피가 뛴다. 같은 혈맥 나의 겨레 웃음에 융화도 우리 국악.”

이 노래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교가이다.
가사는 초대 교장이셨던 박헌봉(朴憲鳳)선생이 지었고, 작곡은 내가 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는 60년 3월, 4.19가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가 나면서 출발했다.
나는 지난 30여년 동안 국악예술고등학교에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다. 그것은 많은 국악인들이 못배웠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한 때문이기도 했고, 천대받고 냉대받았던 지난날의 고통스러웠던 국악의 길을 후학들에게 물려주기 싫어서이었는지도 모른다.
국악예술고는 8.15 해방 다음해에 몇몇 뜻있는 국악인들이 모여서 후학들에게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국악 교육을 시키자는 취지에서 학교 설립 추진 위원회를 만든 것이 시발이었다.
그래서 해방전에 나와 함께 활동했던 ‘여성국악 동호회’ 회원들이 주축이 되고 국악을 아끼는 실업인, 언론인, 예술계 인사들이 힘을 모아 주어, 1949년에 학교 설립 기성회까지 조직되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본격적인 진전을 보지 못하고 무산되면서 한동안 유야무야 되었다.
그 뒤, 전쟁뒤에 성북구 돈암동에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면서 이를 모태로 국악예술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내가 돈암동에서 일본 적산가옥 부지를 얻어 민속예술학원을 낼 때만 해도 사실, 오늘날처럼 전문 국악예술학교로 성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원을 시작할 무렵만 해도 강사로는 나와 고인이 된 박초월, 김옥진, 그리고 김소희, 무용의 한영숙, 연극에 남민씨 등과 함께 어렵게 꾸려 나갔다. 이렇게 한 삼년여를 운영하다 보니, 학생들의 숫자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처럼 늘어나는 학생들에 비해 수용시설이 크게 모자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규모가 더 큰 시설로 옮기려고 생각하다가 결국 재계의 실업인들이 도와준 돈으로 비원 근처의 관훈동에 1천여평 규모의 2층집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비로소 본격적인 예술학교로의 구상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그로부터 5년여 후인 60년 3월, 관훈동의 낡고 비좁은 교사(校舍)에서부터 문교부로부터 국악예술학교 서립 허가를 얻게 되었고 아울러, 교통부가 위촉한 관광예술요원 양성소 부설기관으로 인가를 받았다.
그러니까, 당시의 국악예술학교는 오늘날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셈이다. 그러나 학교 설립허가를 받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중학과정은 문교부 인정 정규학교였으나, 고등학교는 특수학교로 편성되어 정규 고등학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따로 대입 검정고시를 치러야만이 대학을 진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문교부를 내집 안방 드나들듯이 들락거리면서 정규고등학교 과정 인가를 받아내려고 동분서주한 결과 63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3년제 교육 인가를 받게 되었고, 68년도에 이르러 같은 계열(同係)대학의 진학인가를 취득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국악예술학교 설립을 위해 도와주신 분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먼저 국악인들 중에는 박헌봉, 박초월, 김소희, 김여란, 박소군, 지영희, 한영숙씨 등이 참여했고, 재정적으로는 삼성의 이병철씨, 허정구씨, 조선일보 방일영씨, 삼양사 김연수씨, 코오롱 이원만씨, 전남방직 김용주씨, 박영권씨 등 많은 인사들이 도와 주었다. 이분들 중 대부분은 현재 고인이 되셨는데 지금도 학교 설립 당시 보여줬던 정성을 생각하면 고마움이 앞선다.
물론 이 외에도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지면상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이렇게 각계 각층의 도움으로 세워진 학교가 바로 오늘날의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이다.
60년, 문교부로부터 학교 인가가 정식으로 나자, 나는 선배 동료 국악인들을 부둥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소희 형님, 원 풀렸소. 드디어 학교인가가 났답니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더.”
“아이고, 동상. 그게 정말이여? 큰 일 했구만, 큰 일 했어. 이제 우리 국악인들이 어깨 좀 펴고 살 수 있겠구만이.”
그동안 학교 설립에 발벗고 함께 뛰어 준, 김소희씨는 나를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다. 그 감격의 기쁨을 나눈 사람이 어디 김소희씨 뿐이랴. 많은 국악인들이 내 일처럼 기뻐하면서, 학교 설립에 보여 준 그 때의 열의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초대교장 박헌봉 선생

국악예술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교장으로 박헌봉 선생을 추대했다.
박헌봉 선생은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 했지만,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내고 민족음악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셨던 분이다.
성격이 대쪽같았던 박헌봉 선생은 후에 학교 재정이 미약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후원해 줄 분을 찾으러 다니느라고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였다.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가 60년에 문교부로부터 인가가 나던 무렵에 사실, 국립국악고등학교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이 학교는 국악사(國樂士)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전액 국비 장학생으로 양성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가 우리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와 달랐던 점은 교육 내용이 궁중악(雅樂) 중심으로 짜여져, 우리 서민들의 애환을 담았던 전통 민속음악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우리의 전통 음악은 크게 정악(正樂)과 속악(俗樂)으로 분류한다. 정악은 옛날 궁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음악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궁중 음악을 중심으로 한 가사, 가곡, 시조같은 음악이다. 그리고 속악은 흔히 판소리나 민요, 잡가 같은 것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속악(俗樂)이라는 말 자체가 몇몇 음악 전문가들이 우리의 서민음악을 비하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기도 하다. 음악이 그 시대의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것이라면, 어쩌면 판소리나 민요 같은 우리의 민속음악이 정통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분류는 유치한 시비거리에 불과하겠지만, 아무튼 우리 국악예술학교는 서민들 사이에 면면히 흘러 내려온 우리 가락의 전통을 잇는 학교로서 대를 잇겠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설립되고 나자 또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그것은 재정문제였다.
당시 국립국악고등학교는 학교 운영상 전액이 국고 지원이었지만, 우리 국악예술학교는 뜻있는 국악인들이 세운 사립 예술학교였기 때문에 재정이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박헌봉 선생과 함께 문교부에서 예산 보조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뛰어 다녔다. 그러나 문교부 관계자들만 쫓아 다녀서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박헌봉 선생과 나는 당시 자유당 국회의장이었던 이재학씨 집을 밤 11시가 넘어서 몇 차례 찾아 갔다. 밤 늦게 찾아간 이유는 그 시간이 되어서야 이재학씨가 귀가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60년 겨울로 기억되는데, 눈길에 미끄러지고 뒹굴면서 밤길을 찾아 가는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이 때문에 남편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했다.
“아니 이 늦은 밤에 어딜 갔다 오는거요.”
“미안합니더, 문교부 예산을 좀 받을라꼬 국회의장 댁에 다녀 왔슴니더.”
“국회의장 댁에? 아니 국회의장도 좋고 대통령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말이요, 이거 무슨 놈의 국악 운동을 밤늦게까지 해야 된다는 법이 있소?”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 이해해 주이소.”
“앞으로는 늦지 마시오.”
사정을 모르는 남편의 나무람은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사정을 이해 시키기 위해 박헌봉 선생을 초대해서 남편에세 시조창을 가르쳐 주도록 하는 등, 나름대로 애교있는 술수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남편은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음으로 양으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떠나고 안계시지만, 참으로 고맙고 그리운 분이다.


 

국악관현악단을 창설하고


초대 교장이었던 박헌봉선생은 천성이 선비 타입으로 남에게 머리를 숙이거나 사정하는 일을 잘 하질 못했다. 그래서 함께 일하면서도 어렵고 구차한 일은 항상 내 몫이었다.
박헌봉 선생은 일찍부터 국악 이론가로 자리를 굳혀 왔는데, 학교 설립때부터 국악 악사부(樂士部) 재정과, 새악기 제작 등을 추진했고 몇 년 후, 국악관현악단 창설이라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또 그는 ‘창악대강(唱樂大綱)’이라는 국악 이론서를 집대성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에 박헌봉 선생과는 국악예술학교를 더욱 발전시켜 국악만 전문으로 가르치는 대학을 세워보자는 원대한 계획까지 구상했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학교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당시 어려움은 정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학교 건물도 변변하게 마련하지 못해 남산으로, 돈화문으로 옮기면서 석관동에 신축 교사를 세우기까지 내 집 없는 설움을 톡톡히 맛봐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사들은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학생들도 향학열을 불태웠다.
그런데 문제는 교사들의 봉급이었다. 그것은 교사들이 학생수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학생 수도 적은데 무슨 교사를 그렇게 많이 써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보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술학교는 일반 학교와 달리 일반교사와 예능교사가 이중으로 필요하다. 즉, 일반교사는 정규 학과 과정을 가르쳐야 하고, 예능교사는 학생들의 전공에 따른 예능 실기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다른 학교에 비해 교직원의 인건비가 두 배나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 학교 상무이사(常務理事)와 교사(敎師)를 겸하고 있었다. 하루는 월급 날이 다가왔는데, 교장으로 있던 박헌봉 선생이 나를 불렀다.
“향사선생, 큰일 났소. 이걸 어쩌죠?”
향사(香史)는 나의 호인데, 박헌봉 선생은 항상 나를 향사 선생이라고 호칭했다.
“무슨 일입니꺼. 말씀해 보이소.”
“이 달 분 선생님들 월급 줄 돈이 없어요, 이걸 어디서 구하죠.”
“네? 월급 줄 돈이 없다고예? 아니 학교 재정이 벌써 바닥났습니꺼.”
“사실은 지난 달에 말씀드릴려고 했는데, 어떻게 되겠지 싶어서, 아무 말도 못했소이다.”
학교를 세워 놓기만 하면 뭐하나. 교사들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쩔쩔 매는데, 이거 정말 큰일났다 싶었다.
“걱정 마이소. 이달 월급은 정상적으로 나갈 겁니더.”
나는 묵묵히 말했다.
“아니 향사선생, 어디서 돈이 나와서 월급을 준단 말이오.”
박헌봉 선생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돈이 없으면 제 사재라도 털어야죠. 교사들 월급은 줘야하지 않습니꺼.”
나는 이렇게 사재를 털어서 근 1년여 동안 교사들의 봉급을 해결해야 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나는 관계 기관에 학교 예산을 보조받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현행 법규상 사립학교 지원이 힘들다고 난색을 표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사립학교를 세우는 사람들은 웬만한 재벌가들이 아니면, 학교 설립은 상상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최근에야 사립학교법이 제정되어서 교육부의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때 당시에는 공립 학교 외에는 예산 지원이란 상상 할 수 없었다.
나는 이게 의문이었다.
우리의 국악을 살리자는 취지로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니까, 관계기관에서는 ‘참으로 큰일을 했다’고 칭찬하면서도, 예산배정이나 지원은 한 푼도 없는 현실이었으니 학교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문교부의 고위 간부를 만나 예산 배정을 요구했다.
“박선생님 사정은 잘 알겠지만, 현행 법규상 사립학교 예산 지원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좀 이해를 해 주셨으면....”
“아니 우리 국악을 살리자고 학교를 허가해 주고서는 예산 지원을 할 수 없다고예?”
“네, 물론 당연히 해주어야 옳지요. 그런데 사정이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좋습니더. 그럼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더.”
“방법이라뇨?”
“교사들 월급도 못 주는 학교, 더 이상 운영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꺼. 학교를 폐교시키겠습니더.”
“폐교요? 금방 폐교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당시에 국악예술고등학교는 서울시와 문교부, 그리고 문공부 등 관계 기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학교였다.
즉, 나라의 주요행사나, 국가적인 내외빈 접견식, 각종 문화 행사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우리 국악 예술학교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안됩니다. 박선생님을 비롯해서 국악인들이 어떻게 세운 학교인데 폐교시킵니까.”
“그럼 예산 지원좀 해주시겠습니까? 확답을 주이소.”
“기다려 보십시오. 무슨 수가 있겠죠.”
당국장는 고개를 떨구며 힘없이 말했다. 때로는 이렇게 협박과 애걸로 어렵사리 예산을 조금씩 보조받을 수 있었다.
그 뒤 국회의원 유청씨와, 윤제술 의원이 국회에서 예산을 통과 시키는 과정에서 사립학교에 보조금을 줄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조금 숨통이 트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도 자부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학교의 교사들은 당대의 인간문화재 명인들로 짜여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 때 당시의 강사들을 보면, 판소리 분야는 명창 박록주, 김여란, 김소희, 박초월씨 등이 교사로 참여 했고, 거문고에는 신쾌동씨, 가야금 병창은 내가 직접 뛰었고, 가야금 산조는 김윤덕, 성금련씨가 맡았다. 또 북청사자놀이의 윤영춘씨, 꼭두각시의 남운용, 봉산탈춤의 이근성, 경기민요의 이창배, 김순태씨, 농악에는 전사섭, 전사종, 상무에는 정오동, 피리의 이병우, 대금의 한범수, 김광식, 아쟁의 한일섭, 해금의 지영희씨 등도 한몫을 해 주었다.
최근 많은 문화재급 명인 명창들이 대학의 국악과에서 학생들의 강의를 맡고 있는데,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 국악예술학교 학생들은 당대 최고의 명인 명창들을 모시고 최고의 수업을 받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재정이 미약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국악예술학교에서는 국악 중흥을 위해 국악관현악단을 창설했다. 국악관현악단의 창설은 사실 당시의 여건으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국악관현악단을 창설하게 된 이유는 초창기 국악 예술학교가 관광 예술요원 양성소였기 때문에 주한 외교사절이나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참석해야 했고, 또 여러 예술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 내에 전문적인 국악 관현악단 창설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국악예술학교 학생들을 단원으로 대규모 국악 관현악단을 창설하는 데는 2년역의 기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창단을 보게 되었다.
초창기 국악관현악단을 이끌고 지도하셨던 분은 지영희(池映熙)선생이었다. 지영희 선생은 작고하셨는데, 당시 해금의 명인으로 국악 관현악 분야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당시 대개의 학생들이 그랬듯이 가정형편이 넉넉해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웠고, 심지어는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 밤 늦게까지 연습을 했다. 나는 이런 사정을 뒤늦게 알고, 지영희 선생을 통해 야식대를 계속 뒷바라지 하게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국악 예술학교의 국악 관현악단은 지난 65년 7월 국립극장에서 처음으로 제 1회공연을 가졌다.
해방 이후 민간 국악관현악단으로는 처음으로 한 공연이었다. 그때의 감격과 기쁨이란 실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악도 관현악으로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의를 표했고, 신선한 감동을 던져 주었다.
현재 국악예술고의 국악관현악단은 서울시로 이양되어, 시에서 직접 운영하고 있는데, 국악과의 기악 전공자들에게 문호를 열어 놓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국악 예술학교의 국악관현악단은 우리 국악을 발전 시키는데, 한몫을 단단히 해냈다고 자부한다.

 

석관동 신축 교사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 무주택자들의 설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월세, 전세를 전전하는 사람들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내집 마련의 꿈일 것이다.
우리 국악예술학교는 설립 초기부터 약 10여년 동안 집 없는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학교 설립을 받아서 의욕적으로 출발은 했지만, 재정난과 함께 학교다운 학교 건물을 마련하지 못한 설움은 무척이나 컸다.
처음에 관훈동에서 출발한 국악예술학교는 늘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남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돈화문으로 옮기는 등, 두어 차례 이사를 해야 하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갈수록 늘어나는 학생들로 인해 수용시설의 절대적 부족은 번듯한 학교 건물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장 선생님, 이렇게 이사만 다닐 게 아니고 우리도 번듯한 학교 하나 새로 지읍시다.”
나는 박헌봉 교장 선생에게 학교 건물을 새로 짓자고 제의했다.
“학교를 새로 지어요? 아니 향사선생, 학교를 새로 짓겠다뇨? 하하하. 그 말씀 농담이시겠죠.”
“박선생님 농담 아닙니더. 그럼 매일같이 이렇게 집도 없이 이사 다닐 거예요? 우리도 번듯한 학교 하나 지어 봅시더.”
“학교를 새로 짓자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문제는 재원을 어디서 조달하실 겁니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꺼. 한번 해보입시다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먼저 학교 부지를 마련하는 일이 급했다.
이쪽 저쪽 수소문을 하다 보니까, 석관동에 문화재 관리국 소유로 되어 있는 놀고 있는 땅이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서울시와 교육구청을 들락거리면서, 석관동의 땅을 불하받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 다녔다.
당시에 나는 일본에 한국무악원을 설치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고갔었는데, 학교 신축 관계로 무악원 일까지 모두 팽개치고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학교 신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재정이 급했다. 그래서 전남방직의 김용주(金容株)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여사가 학교를 새로 짓겠다는데, 도와주어야죠.”
김회장은 쾌히 승나하면서 재정마련에 후원을 해주었고, 당시 일본에서 무악원을 운영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재일교포 실업가 하석암(河石巖), 박수정(朴水晶), 박한식(朴漢植)씨 등이 지원을 해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당시 대전에 있던 만평 가까운 땅을 학교에 기증했고, 박소군씨도 이에 동참해 오산에 있는 복숭아밭 오천평을 기증했다.
또한 학교 부지와 재정 마련에 당시 학교에 관여했던 모든 국악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했다.
이제 돈도 어느 정도 마련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학교부지였다.
나는 계속 관계당국을 들락거리면서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국유지를 사립학교에서 불하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날인가 학교 부지 출하관계로 서울시에 들어갔더니 관계 공무원이 나에게 말했다.
“박선생님, 이렇게 매일같이 오시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다고 쉽게 해결 되는 일이 아니니까, 연락이 갈 때 까지 기다리시죠.”
“기다려요? 아니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처럼 보입니까. 당신들은 시간만 되면, 집으로 퇴근하는 사람들이지만, 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박선생님, 그런 뜻이 아니고, 국유지를 불하받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예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윗분들을 직접 만나겠어요, 누굴 만나면 되죠?”
“저, 그건 좀 곤란한데요....”
“이보이소, 지금 내가 국유지를 불하 받아서, 내 잇속 챙기는 사업하려고 이러는 줄 아십니까? 어려움 속에서 애들을 가르쳐 보겠다고 이러는 건데, 협조는 못해줄 망정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불하 받으려는 땅은 문화재 관리국 소유로 되어 있는데, 문화재 관리국이라면 우리 문화를 살리고 보존하는 일을 하는 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국악을 살리자고 학교 부지를 불하받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일은 우리 공무원들이 앞장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육영사업과 국악교육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부지 불하를 요구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학교부지 1천1백80여평을 마련해서 3층 규모, 건평 7백90평의 신축교사 기공식을 하게 되었다. 1969년 8월 일이었다.
그리고 일년 후인 70년 8월 석관동의 신축교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려움 속에서 재단법인 설립

석관동 신축 부지 준공식이 있던 날, 나는 이 일을 해냈다는 게 믿을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기적같은 일이기도 했다.
국유지였기 때문에 불하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숱한 고비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준공식이 있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석관동 신축 건물로 학교를 이사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학교 재정은 빈털터리 신세였다. 나는 문교부로부터 예산 보조를 받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 다녀야 했다.
물론 도와주는 분들이 많았다. 당시 서울시 교육감으로 계시던 하점생(河点生)씨는 각별하게 우리 학교에 애정을 가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지난 80년까지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보조금 일부를 도움 받을 수 있었고, 문화재 관리국에서 재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코오롱 이동찬 회장에게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도움을 준 많은 분들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국악예술고등학교의 석관동 시대는 곧 사립학교 재단법인 시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무렵 나는 국악예술고등학교를 튼튼하게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 재단법인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에 석관동 학교 부지로 이사하기 위해 음으로 양으로 도와준 전남방직의 김용주회장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국악 예술학교 후원회를 조직했었다. 그래서 김용주시가 회장을 맡고 나와 여러 국악인들이 이사를 맡았었다.
그 해가 바로 72년이었다.
그 해, 나는 서독 뮌헨에서 열린 올림픽대회에 한국 민속 무용단과 국악인 대표로 참석해서 4개월여 동안 유럽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돌아 왔다. 그런데 장기간 학교를 비운 탓이었는지, 학교에 돌아와 보니 여러 가지 잡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재단법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교장직을 맡고 계시던 박헌봉 선생이 이사진에서 제외되고 명예 교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사회에서는 박헌봉 선생이 연로하신 탓에 나름대로 예우를 해드린다고 했던 발상인데, 본인에게는 이사직에서 제외되었던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오해를 하셨던 모양이다.
박헌봉 선생은 당시에 연로하시고, 중풍으로 고생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법인이 설립되어 이사로 임용이 되면, 급여가 나가지 않고 무상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김용주 회장은 명예 교장으로라도 추대해서 노후의 생계를 마련해 드리려는 의도에서 이사직에서 제외시켰던 것이다.
평생을 국악교육에 몸바치고, 또 국악예술학교를 위해 노력해 왔는데, 이사직에서 제외를 시켰으니 당연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밖에.
박헌봉 선생은 이후 한동안 오해가 풀리지 않아, 법원에 소송가지 제기해와,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힘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거나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 고인이 되신 박헌봉 선생에게 무척이나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아무튼 재단법인 설립은 문교부와 문공부의 허락으로 예정대로 추진이 되었다. 나는 재단법인 설립을 위해 대전에 있던 전답 1만평 중, 6천5백여평을 매각케 하였고, 박소군씨가 기증한 오산의 5천평도 매각해서 재정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73년, ‘재단법인 국악학원’이라는 명칭으로 법인이 설립 되었고 나는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 되었다.
초대 박헌봉 교장 선생의 후임으로 민속학자인 임동권 박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물론 재단법인 설립 과정상, 법원의 소송문제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문교부에서 위촉한 관선(官選) 교장인 박원익(朴元翼)씨가 교장으로 선임되기는 했지만, 다시 임동권 교장으로 환원 되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했던가. 이러한 변화는 국악예술학교가 성장해가기 위한 하나의 변화이고 진통이었다.
재단법인이 설립되면서 학교도 변화가 왔다. 그동안 동계(洞契)대학에만 입학할 수 있는 학력 인정만 받아왔던 국악예술학교가, 문교부장관 고등학교 학력인정이 지정 됨으로써 정규 고등학교로 승격된 것이다. 국악예술학교가 생긴지 실로 20여년만에 정규 고등학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후, 나는 이사장 자리를 임동권 박사에게 넘겨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후학들 양성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임동권 박사는 지난 88년까지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해오면서 우리나라 국악 발전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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