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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2. 하루만 목을 놓아두면 목에 풀이 난다?2022-10-01 16:24
작성자 Level 10

12. 하루만 목을 놓아두면 목에 풀이 난다?


기교와 예술


“예(藝)에 산다는 길은 험난했다. 더욱이 예(藝)를 도(道)로 터득하기는 어려운 일이엇다, 그러나 그 중지에까지 가보고 싶었다.”

이 글은 내가 ‘가야금 병창곡집’이라는 책을 내면서 머리에 쓴 말이다.
나는 14살 때부터 우리 가락에 매혹되어 반세기를 훨씬 넘게 한길을 걸어오는 동안 참으로 많은 어려운 일들에 부딪쳤다. 그러면서도 나는 항상 예술은 ‘도(道)’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판소리 하나 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가야금까지 연주하면서 소리를 하시는지 참 대단합니다.”
어떤 면으로 봐서는 대단한 칭찬같이 보이지만, 좁은 소견으로 해석하자면 분명 이 말은 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 뜻에는 ‘판소리 하나 가지고도 평생을 득음하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해야 하는데, 가야금까지 뜯을라치면, 결론적으로 두 가지 다 소홀해질 수 있지 않느냐는 소리다.’
사실, 가야금 병창은 어렵다. 그건 내가 평생을 해오면서도 항상 느끼는 나의 심정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처럼 홀가분하게 서서 소리만 하는게 아니고, 가야금 열 두 줄에 신경을 쓰면서 소리를 해야 하니 곱절로 힘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을 어려운 것으로만 돌리면, 절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어려울수록 더욱 노력하고 정진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게 나의 생각인 것이다.
나는 가야금 병창과 더불어 한때는 ‘입체창(入體唱)’이라고 하는 것을 개발했었다.
‘입체창’이란, 말 그대로 판소리를 2명이 서서 주고 받는 것으로 북으로 반주를 하는 독창적인 것이다. 물론 혹자에게서 나의 연주 방식이 너무 기교에 치우지지 않느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통적인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흠이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 내가 가야금 병창을 배우기 위해 당대 가야금의 대가인 강태홍 선생을 찾아뵈려고 하자,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야금 병창을 하게 되면, 소리가 ‘발발성’이 된다고 하는데 왜 가야금 병창을 배우려고 하느냐.”
앞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지만 ‘발발성’이란 떠는 목이란 소리로, 발발 떨리는 모소리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노력에 의해서 득음을 하지 못하고 목만을 이용해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목을 말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선생에게 드리자, 강태홍 선생은 크게 나무라면서, “그냥 고수의 북에 맞춰 소리를 하거나 가야금 연주하면서 소리를 하거나 소리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었다.
나의 생각은 변함없다. 기본적인 수업이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기교를 부리면 서커스가 되는 것이고, 밑바닥이 튼튼한 사람이 기교를 부리면 예술이 되듯이 어떤 분야든 그 나름대로의 독창성과 테크닉이 있게 마련이다.
다소 딱딱한 이야기같지만, 이왕 음악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조금 하고 넘어가자
사실 우리 판소리에는 고저(高低), 장단(長短), 기복(起伏) 등 소리의 변화가 심해서 양악과 비교해 보면, 그 음색과 음운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리하는 사람의 음색에 의해 성음도 여러 가지인데, 박헌봉 선생인 쓴 창악대강(唱樂大綱)을 보면, 이 목 성음의 분류를 잘 해 놓았다. 잠깐 소개해 보면, 뱃속에서 바로 위로 뽑는 통성(通聲)이 있는가 하면, 쇠망치 처럼 딱딱한 철성(鐵聲), 신목소리와 같이 껄껄하게 나오는 수리성, 등 10여 가지가 넘는다. 이중에서 천구성은 튀어나오는 목소리로 전통적인 명창의 성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귀곡성은 귀신의 울음 소리같이 사람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소리를 말한다.
한때 춘향가의 ‘쑥대머리’로 만인들을 울리고 웃긴 명창 임방울의 경우에는 목구성이 뛰어난 예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의 목은 흔히 천구성과 수리성을 갖춘 명창으로 평가하고 있다. 수리성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약간 쉰 듯하고 껄껄한 소리를 말하는데, 임방울은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곰삭은 듯한 소리와 함께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를 두루 구사해 풍부한 성량의 천구성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 성음을 변화 시키는 푸는 목, 감는 목, 미는 목, 방울목, 깎는 목, 그리고 지나치게 기교를 부리는 노랑목, 기지개목 등 40여 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목 성음의 고저에 따라 보통 서리의 평성(平聲), 윗소리 등의 기본적인 목소리에 위의 변화를 무상자재하게 구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득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길을 향해 불철주야 공부하고 닦는 길밖에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도 한때 소리 공부를 하면서 너무 무리해서 목에서 분홍 빛깔의 가래가 섞여 나오고, 얼굴이 퉁퉁 붓는 고생을 겪은 적이 있다.
자랑같은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나이 70이 넘도록 지금도 나는 하루도 목을 쉬게 하지 않는다.
‘하루만 목을 놓아 두면, 목에 풀인 난다.’
예전에 모셨던 스승님들의 지론이다, 나는 이를 항상 새기고 있다.
하긴 이날 평생동안, 소리하는 사람이 하루라도 목을 풀지 않고 좋은 목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딱 한사람이 있었는데, 왜정 때 당대를 풍미했던 여류명창 이화중선이다.
이화중선은 아침에 자리에서 막 일어나 소리를 해도 꾀꼬리같은 성음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이런 목은 1세기에 한사람 나올까 말까 하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구성의 목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특히 이화중선은 쇄옥성이라는 맑은 음색을 지닌 분이었는데, 맑은 음색에만 그치지 않고 상성(上聲), 중성(中聲), 하성(下聲)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음역을 뱉어냈다.
70이 넘은 요즘도 나는 하루에 두서너 시간은 목을 풀어야 잠이 온다. 가끔 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자연 목을 쓰게 된다. 또 이렇게 목을 쓰다 보면,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도 쌓이지 않고 몸도 가뿐해진다. 이것도 천성인가.

 

‘쑥대머리’ 명창 임방울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천구성은 말 그대로 하늘이 내려주신 목을 말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이 천구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천구성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명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목을 바탕으로 쉬지 않고 노력해야만 비로소 명창이 될 수 있다.
최근에는 몇몇 명창들은 별로 좋지 않은 목을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습을 통해서 명창으로 태어난 분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의 명창들은 이 천구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타고난 목, 바로 천구성은 모든 소리꾼들이 소원하는 목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명창이 되기 위한 조건은 또 있다. 바로 천구성에 수리성과 철성을 겸해야 한다. 수리성은 쉰 목처럼 껄껄한 소리를 말하고, 철성은 쇠망치처럼 견강하고 딱딱한 소리를 말한다.
나이 드신 분들은 이름 석자만 대면, ‘아, 그 명창’하고 알 분이겠지만, 이 천구성에 수리성을 겸한 명창을 꼽자면, 당연히 임방울(林芳蔚)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임방울은 내가 초창기에 창극단에 있었던 시절부터 함께 생활한 명창이다. 특히 그가 부른 춘향가의 ‘쑥대머리’나 단가 ‘편시춘’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장육부를 뒤흔들게 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임방울의 고향은 전남 송정리로 당대의 명창이었던 김창환(金昌煥)선생이 그의 외삼촌이라고 한다. 또 박재실(朴在實) 선생과, 공창식(孔昌植) 선생, 그리고 나의 스승이기도 한 유성준(柳成俊) 선생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고 스물 다섯되던 해에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서 ‘쑥대머리’로 입상하면서 일약 명창의 반석에 끼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쑥대머리’는 일정시대 당시 레코드만 20여만장이 팔렸다고 하는데, 그 당시 축음기 보급률을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임방울과 나와의 인연은 내가 대구극장에서 첫무대를 설 때부터 시작해서 이어져, 창극단 시절 애환을 같이 했고, 해방 후에도 우리 국악 발전을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임방울의 원래 이름은 임승근(林乘根)이라고 한다. 임방울이란 예명은 누가 지어줬는지 잘 모르겠지만, ‘방울’이란 말이 상징해주듯이 목구성이 뛰어난 분이었는데, 이 이름 때문에 화제도 많았다. 언젠가 창극단 시절, 누군가 임방울에게 농담삼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임선생님 이름은 그게 뭐다요? 방울이. 점잖치 못하게 말이오.”
“아니 왜 멀쩡한 남의 이름은 걸고 넘어진데여? 왜 내 이름이 뭐가 어때서 그려? 이래봬도 이 이름은 내가 어렸을 때, 방울 소리처럼 초롱초롱하게 소리헌다고 우리 아버님께서 지어준 거여.”
아무튼 임방울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답게 소리를 참 잘했다.
특히 임방울은 세도가나, 부자집 경사 잔치판에 나가서 소리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던 사람인데, 그 대신 나라를 잃고 설움에 싸인 우리 동포들을 위해서 소리판을 벌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고집이 무척 세어서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금을 준다 해도 소리를 하지 않았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시골 노인네들에게는 무료로 구경할 수 있게끔 지시하기도 했다.
이 고집 탓이었는지, 해방 후 레코드 취입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녹음을 하여 재생한 소리는 본래 목소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해방 후, 임방울씨의 레코드판이 몇 장밖에 남아 있질 않다고 한다.
이렇게 서민들을 울리고 웃기면서 많은 일화를 남기 임방울씨는 1961년에 향년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악인장으로 치러졌는데, 상여 행렬이 시청 앞을 지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몰려들었는지 상여가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그후, 지난 88년. 우리 국악인들은 명창 임방울씨의 넋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는데, 그동안 묘지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엉망이 된 묘지를 경기도 여주의 남한강 공동묘지에 이장키로 하였다.
그래서 추모비 건립을 위해 나를 비롯해 많은 국악인들이 모금운동을 했다. 결국 묘지 이전을 위한 자선 공연을 통해 재원이 마련될 수 있었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명창의 추모비를 우리 국악인이 뜻을 모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나이가 70 고개를 넘다보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느낌을 종종 갖는다. 어느 때인가 나도 임방울씨처럼 나의 모든 것을 이 땅에 두고 머나먼 곳으로 가겠지.
문득 임방울씨가 즐겨부르던 ‘편시춘(片時春)’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아서라 세상아 허망허다. 군불견(君不見)① 동원도리편시춘(動圓桃梨片時春)② 창가소부(娼家小婦)③야 말을듣소. 대장부 평생 사업 연연이 넘어 가니, 동류수(東流水) 굽이굽이, 물결은 바삐 바삐. 백천(百川)은 동도해(東倒海)④요. 하시부서귀(何時復西歸)⑤라.”

 

①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②봄동산에 복숭아꽃 오얏꽃이 잠시 피었다는 뜻. ③거리의 여인을 의미 ④모든 시내는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닿는다는 뜻 ⑤어느 때나 다시 서쪽으로 올까나.

 

 

예인은 죽어서 제자를 남긴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자기 이름을 남겨두고 떠나길 원한다. 그 중에서 특히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오죽하면 경서에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고 했을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같은 예술인들은 세상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 행복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예술인들이 이름을 남기는 일보다도 더 귀한 것들을 남길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다.

나는 지난 1969년 10월 국악 생활 35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가진 적이 있다. 이 기념 공연에서 나는 내가 가르치고 지도해온 제자 50여명과 함께 초대형 가야금 병창을 공연했다.
나는 이 공연에서 가야금 독주를 비롯해서 지난 날 창극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던 춘향전 등의 공연물을 내놓았고, 그동안 내가 작·편곡을 한 민요와 가야금병창곡도 소개하여 호평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 공연이 무엇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나의 아끼는 제자들이 출연해서함께 공연을 펼쳤고, 동료 국악인인 박초월씨와 김소희씨 등이 찬조 출연해서 자리를 빛내주었던 점이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동안 내 손을 거쳐간 제자들을 꼽으라하면, 나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다. 국악예술고 출신을 비롯해서 일본의 한국 무악원 출신까지 합하면, 수천명 단위는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가야금 병창의 법통을 잇는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은 60년대 말부터 나의 국악 전수소를 거쳐 간 전수생들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지금 가장 활발한 활약을 하고 있는 제자 안숙선은 현재 국립 창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원래 안숙선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인데 어렸을 적부터 ‘아기명창’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다. 천부적으로 목이 좋고 재능이 뛰어나 남보다 빨리 국악계에 발을 디뎠는데, 현재 활동중인 명창 강도근씨의 조카이기도 한다. 나와의 인연은 명창 김소희씨의 소개로 닿았는데, 나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받고 정광수씨, 박봉술씨, 정권진씨 등 여러 선생들에게서 소리를 배우고 현재는 준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앞으로 명창으로서 이름을 남길 만한 재목이다.

또 연극배우로 탈렌트도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 김성녀는 천부적으로 아주 끼가 많은 제자이다. 부군이 극단 미추 단장인 손진책씨인데, 열렬한 후원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경상남도 함양 출신의 강정숙은, 창은 김소희씨에게서 사사받고 내게서는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또 경남 진주 출신의 조남희, 장영찬 등은 조상현씨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내게서는 가야금 사조와 병창을 배웠다.

또 전북 전주 출신의 윤소인은 박초월씨에게서 창을 사사받고, 나한테서 가야금 병창을 이수하였다. 이외에도 정한희, 정예진, 이금희, 전영희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우리 전수소의 전수생 출신들로 현재 국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현재 국악 전수소에서 가야금 병창을 배우고 있는 문하생들은 이영신, 이명희, 복악화, 정명희, 정진숙 등이 있는데, 이영신양은 중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현재 전남대 국악과 강사로 활동중인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이다. 또 남성으로는 아주 이채롭게 가야금병창을 이수받고 있는 강동열군과 전수중인 이상균군이 있는데, 강동열군은 현재 중앙대 대학원에 재학중이고 이상균군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중앙대 강사로 활약 중이다.
고마운 것은 지난 89년 우리의 전통 예술을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만든 ‘가야금 병창 연구회’에 나의 제자들이 모두 참여해 회장으로 김성녀양을 뽑았는데, 이러한 제자들의 활동에 무척이나 가슴이 뿌듯하였다.

또 요즘 국내외적으로 우리 가락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름을 한껏 날리고 있는 ‘김덕수 사물놀이패’ 또한 우리 서울 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중견 국악 작곡가로 명성을 굳힌 중앙대 국악과의 박범훈 교수도 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으로 국악 발전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박범훈 교수는 최근에는 우리 국악 예술고등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이 모교 재단 이장을 맡는 보기 드문 광경도 보여주었고, 동문회 회장인 김재문씨는 새 학교 부지의 선정에서부터 준공까지 크나큰 일을 맡아 했다. 또 학교 이사를 맡고 있는 최태현 교수, 김영재 교수, 장덕화씨 등을 비롯 이 학교 출신의 많은 제자들이 학교를 위해 힘쓰고 있기도 하다.
제자들이 열심히 기량을 익히고 일취월장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무척이나 큰 보람을 느낀다.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나는 요즘 무척이나 행복하다. 제자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그 중에서 훌륭한 제자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옛말을 바꿔 쓰기로 했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 아니고 ‘호사유피(虎死留皮) 예인유제(藝人有弟)’라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예술인은 제자를 남긴다.

 

먼저 사람이 되라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사람 됨됨이가 바로 되어야 올바를 예술을 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연전에 텔레비전에서 김아무개 코메디언이 ‘먼저 사람이 되라’라는 말을 써서 유행한 적이 있지만, 사람 됨됨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판소리 하는 사람들이, 흔히 산사에 들어가 몇 년씩 소리 공부를 하거나 여름 겨울을 택해 도야(陶冶)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 공부도 공부지만,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세속적 욕망을 떨치고 참 예술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도를 닦는 마음으로 공부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도야’라는 원래 말의 뜻도, 타고난 품성이나 재능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갈고 닦는 일을 의미한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지난 날, 유성준 선생님을 비롯해서 많은 선생님들에게 공부를 하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서당에서 글읽기 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생각이 든다.
유성준 선생의 경우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한 대목 한 대목 지적해서 소리를 해보도록 해서 잘잘못을 따지곤 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대목대로 잘해내면, “무쌍이로구나.” 하시며 칭찬하시고, 만약에 잘못되면 “종아리를 걷어라.” 하시면서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회초리로 호되게 종아리를 때리곤 하셨다.
하긴 어떤 국악인의 말을 들으면, 소리를 배우면서 한 대목이라도 잘못되면, 선생의 곰방대가 날아오거나 목침이 날아와 머리통이 터지는 일까지 있었다.
그처럼 지난날 스승들의 판소리의 지도는 엄격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 속에서 한 대목 한 대목씩 익힐 수 있었다.
더군다나 교재도 없고, 사설지도 없이 구전심수로만 배워야 했던 당시의 공부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한 우리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좋은 환경인데도 잠시만 한눈 팔면 태만해지고 게을러지기 일쑤이다.
물론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재능은 뛰어난데도 불구하고, 자기 재능만 믿고 공부를 게을리하는 제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가끔 제자들에게 꼭 전수시켜주고 싶은 대목이 있는데, 그 부분을 제자들이 내가 인정할 만큼 소화시켜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제자들과 마주 앉아 그 부분이 될 때까지 밤늦도록 반복하여 연습을 하게 한다.
정말 이럴 때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 음식이 도통 먹히질 않는다.
“선생님 식사나 하시고 지도해 주시죠.”
“내가 지금 밥이 넘어가게 생겼냐. 잔소리 말고 어서 그 부분이나 계속 연습해 봐라.”
가르치는 사람 속이 이렇게 타는데, 배우는 학생들은 오죽이나 힘들고 어려울까. 그러나 확실히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부분은 영영 놓치고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쉬지 않고 스스로 연습하다 보면, 결국 내가 놀랄 만큼 훌륭하게 연주해 내게 된다. 그럴 때는 오랜만에 포식을 하게 된다.

나의 교육 스타일은 가능성만 엿보이면, 철저하게 지도하고 가르치는 스타일이다.
때로는 필요하다면, 개인의 사생활까지 일일이 간섭한다. 어떤 제자들은 나의 이러한 행동을 불만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소리의 길을 걷는 예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없이 오직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직분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요즘 교육계를 빗대 ‘교사는 있으나 스승은 없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소리를 가르치는 일이 스승과 제자간의 공적인 업무라면, 그들의 사생활을 돌봐 주는 일은 인간적인 애정의 발로이다. 

그러나 ‘엄격’은 ‘부드러움’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정이 많아서 탈이라면 탈이다. 제자들은 다 자식같다. 혹, 제자들에게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나의 맥을 이어 갈 분신들이라는 생각에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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