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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1. 옹헤야과 꽃타령-신민요곡2022-10-01 16:23
작성자 Level 10

11. 옹헤야과 꽃타령-신민요곡


인물치레와 너름새


판소리사를 이야기 할 때, 빠질 수 없는 분이 있다. 바로 근대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 선생이다.
신재효 선생은 그가 지은 ‘광대가’에서 광대의 자격 요건을 몇가지로 나누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광대의 조건은 요즘 말로 치면 명창의 조건이라고 다시 표현할 수 있겠다.
신재효 선생이 말한 명창의 조건은 첫째로 인물치레다. 그리고 둘째는 사설치레, 또 셋째는 득음, 그리고 네 번째는 너름새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인물치레라고 하는 것은 외모를 말하는 것이요. 사설치레는 판소리에서의 사설을, 그리고 득음은 음악적 성음을, 마지막으로 너름새라고 하는 것은 창자의 연기력을 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몇 가지나 부합될까. 인물이야 내가 생각해도 별로 이쁜 구석은 없는 듯 싶다. 동일가극단 시절 일목장군으로 분장한 나를 남자로 착각하고 기방의 기녀들이 나를 납치하려고까지 했으니, 이 점은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명백해지는 것이 아닐까.
사설치레는 어떨까. 글쎄, 평생을 해온 소리지만, 아직도 옛 명창 선생들의 사설치레에 비하면 아직도 뭔가가 어색하고 멀었다는 생각뿐이다.
득음은 어떤가. 열 네 살때 대구극장에서 ‘산악이 제형허고~’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일약 ‘소녀명창’이 났다는 소리를 들어 봤지만, 그것은 타고난 음색일뿐, 평생동안 소리를 해오면서 정말 내가 득음을 하였는가라고 반성해 볼 때, 그것은 아직도 여전히 미지수다.
마지막으로 너름새를 보자. 너름새는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창자의 연기력을 말하는데, 동일가극단 시절부터 해방 후 여성국악동호회를 거치면서 수많은 무대에 올라가 연기를 했고, 또 영화도 몇편 찍었으니, 연기력은 어느 정도 기본은 갖췄다고 생각한다면 자만일까.
나는 1968년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형문화재 제 23호 가야금 병창’이다.

한참 공부하던 젊은 시절, 나에게 소리를 가르쳐 준 조학진 선생님, 그리고 유성준, 박동실, 이기권 선생님 박녹주 명창을 비롯해서, 가아금을 가르쳐 주신 강태홍, 오태석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셨던 명창 선생님들, 그분들의 고마움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서 공부하는 일은 참으로 행보한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운좋게도 나는 유명한 명창 선생님들에게 소리와 가야금을 사사 받았다.
판소리는 몇 개의 유파로 나눈다.
판소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흔히 판소리는 전라도의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 서로 나뉘어 동편제(東便制)와 서편제(西便制)로 나뉘고, 충청 강원 경상을 대표하는 중고제, 그리고 동편과 서편을 합쳤다는 보성소리(일명 강산제)등으로 구분한다.
약간 설명을 부언하자면, 동편제는 조선조 시절, 약 200년 전에 명창 송흥록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 오는 소리로 그 성음이 우조(羽調)라고 하여, 웅장하고 정중하며 굳건하며 끝을 맺을 때는 힘이 있고 둥글게 맺어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동편제가 이와 같이 남성적이라면, 서편제는 이에 반해 여성적으로 계면조(界面調)라 하여, 장단이 늘어지고 처절하며 기교적인 목소리를 많이 부릴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물론 이 편제들은 나름대로 다 맛이 있고 특징이 있는데, 보통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에 의해 이 유파가 결정 되곤 하였다.
나의 스승님이셨던 유성준 선생의 경우 동편제의 법통을 잇는 분이었는데, 현재 명창인 정광수씨의 경우 유성준 선생의 동편제 수궁가를 가장 충실히 이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나의 경우도 동편제의 소리로 구분되었다. 더군다나 오랜 창극생활을 하면서 남성역을 하다 보니, 자연 우조(羽調)의 성음이 나타났는데, 이를 바탕으로 가야금 병창에 열을 쏟다 보니, 서음이 약간 바뀌었다. 그것은 가야금을 하면서 소리를 할 경우, 밝고 거들거리는 성음이 많이 들어 가게 되는데 이러한 소리는 가야금 병창을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흔히 석화제(石和制)라고 한다.
또 가야금의 경우 강태홍 선생과 오태석 선생은 당대의 가야금 병창의 맥을 잇는 명인들로, 특히 오태석 선생은 고종 때 가야금의 명인 박팔괘 선생의 전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었던 분이다.
나는 지금도 가야금 줄에 손이 닳아 손가락에 지문이 없다.
당대를 풍미하던 명인 명창들의 소리와 가야금 가락을 잇고 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요즘은 매사가 힘들다. 목소리도 상성(上聲)이 잘 나오질 않고 중화성(中和聲)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가야금을 무릎 위에 올려 놓으면 세상사의 시름과 번뇌가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가야금과 함께 한 인생. 죽는 날까지도 가야금과 함께 있으리라.

 

사라져 가는 민요를 채집하며

사람들에게 국악이 어렵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국악을 좋아해서 듣고 즐기는 사람들도 듣는 것은 좋지만, 직접하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마련이다.
국악이 왜 어려울까?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같은 특정 분야를 접하면서 ‘국악은 명창들이나 하는 것이다’라고 규정지어 놓은데 첫 번째 원인이 있다. 그리고 또 국악이 귀에 익숙치 않은 까닭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한번 바꾸어 생각해보자. 요즘 젊은 학생들은 하r교 음악 시간을 통해서 서양 음악을 많이 배운다. 길가는 아무 학생이나 붙잡고 서양 음악 중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냐고 질문하면, 음치가 아닌 이상은 한두 곡 정도 쉽게 불러댈 수 있는 게 요즘 세상이다.
자, 쉽게 생각해 보자. 길가는 사람 붙잡고 우리 민요 중에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냐고 물어 보자. 그러면 한두곡 정도 안나올까? 하다 못해 아리랑 가락이나, 옹헤야, 신고산 타령 정도는 흥얼거릴 수 있을 것이다. 자 이래도 우리 국악이 어려운가? 민요가 무슨 어려운 국악 측에 끼냐고 물어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천만에 말씀. 우리 국악의 뿌리는 바로 민요에서 시작된다. 민초들의 한과 즐거움, 슬픔, 기쁨을 표현한 음악이 바로 민요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민요는 우리음악의 시작이다.
요즘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게 정석 코스인 모양이던데, 피아노 학원을 가면 제일 먼저 ‘바이엘’을 가르친다고 한다. 자, 이 피아노 입문서인 바이엘처럼 민요는 국악의 입문서라는 것을 상기해 보자. 그럼 아주 간단하게 결론이 나온다.
사실, 음악이란 것은 양악과 국악을 떠나서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젊은 사람들이 국악보다는 양악이 더 쉽다고 느끼는 것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리 국악보다 양악을 더 친근하게 귀에 익혔기 때문이다. 차이라면 단지 그 차이일 뿐이다.
하긴 나는 서양 음악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어려운 피아노를 어떻게 치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한다.
내가 이 부분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는 너무나도 양음악에 젖어 살고 있었던 까닭에 우리 음악은 지루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치부해 버린 우를 범했던 것이다.
피아노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들에게 한 3개월 정도만 피아노를 가르치면, 기본적인 음은 모두 익힌다고 하지 않는가. 예를 들어 가야금을 한 3개월 정도만 가르쳐 보자. 장담하건데 절대적으로 피아노보다는 가야금을 배우는 속도가 더 빠를 것으로 생각된다.
자,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익숙하게 들었던 음악이냐가 문제다. 그런 의미로 이야기하면, 우리 국악인들과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무척 크다. 특히 방송매체의 힘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국악보다 양악이 더 많이 보급되고 교육되고 방송되는 현실, 이 현실이 우리 국악을 무덤 속에 사장해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대중들이 뒤늦게 국악에 관심을 가지려 해도 그 때는 이미 양악에 귀가 익어 버렸기 때문에 국악을 대하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자, 그럼 문제는 이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민요를 통한 접근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하겠다. 민요를 많이 부르고 즐기다 보면, 자연 우리 음을 알게 되고, 그 속에 담긴 민족 정서를 느끼면서 우리 국악이 대중 속에 자연스럽게 접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민요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 돈암동에서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운영할 때였다. 국악에 관심이 많았던 정객들이나 사업가들이 이따금씩 우리 학원을 방문하여 취미삼아 국악을 배우기도 했는데, 그때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판소리나 단가는 그동안 많은 명창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수되어 왔지만, 국악의 천대로 인해 우리 민요가 많이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혹시 박여사께서 시간이 나시면, 사라져가는 우리 민요를 채집해서 악보로 기록하시는 작업을 하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사라져가는 민요 채집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아울러 민요 채집을 하시면서 우리 국민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새로 편곡도 하고, 또 창작도 하시면 더욱 빛이 날 것 같은데요.”
“듣고보니 그렇군요. 국악인의 한사람으로서 그런 일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런 일은 진작 했어야 할 일인데요, 이렇게 가르쳐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분 말씀은 나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았다.
나는 사실 국악인으로서 욕심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건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러나 그 때 당시 나에게는 더 급한 일이 많았다. 바로 국악 예술학교 창설에 관한 일이었다.
포화 상태에 이른 돈암동의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정식 학교로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면서, 나는 민요 창작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더군다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녔던 시절, 민요를 채집하고 새로운 창작 작업을 한다는 일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던 중, 60년대 말에 기회가 왔다. 국악예술학교가 문교부의 정식 인가를 받고 안정기에 들어서기 시작했고, 나는 국악협회 부이사장 자리를 맡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국악 진흥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당시 국악예술학교 교장으로 있던 박헌봉 선생에게 나의 의도를 말했다.
“박선생님, 정말 큰일입니다. 우리의 향토 민요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데,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우리 민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생겼어요. 가능하면 하루라도 빨리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민요를 채집해야겠는데요.”
항상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훌륭히 해낼내면, 최소한의 물질적 지원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일은 저질러 놓고 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일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죠.”
나는 우선 이 민요 채집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재정 마련에 나섰다. 먼저 아시아 문화재단을 찾아 갔다.
당시 아시아 문화재단의 책임자는 조동재씨였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동재씨에게 우리나라의 국악현실을 설명하고 문화재단의 지원이 절실함을 재삼 강조했다.
“좋습니다. 박여사께서 그런 뜻깊은 일을 추진하신다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사라져가는 우리의민요, 우리의 소리를 찾는 일인데 적극 협조해야죠.”
그래서 아시아 문화재단에서 3백50만원의 예산을 보조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돈을 각 도의국악 관계 기관에 내려 보냈다. 이리하여 경기, 경남북, 충남북, 전남북, 강원, 제주도 등지에 산재한 우리의 귀중한 전승 민요를 채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채집한 민요들은 밭매는 소리, 타작하는 소리, 고기 잡는 어부들의 소리, 베짜는 소리, 방아 찧는 소리, 미영(솜) 잦는 소리, 물레 돌리는 소리, 다듬이 소리, 뽕따는 소리, 멸치잡는 소리 등 온갖 소리를 채집했는데, 이때도 이미 서구 바람이 우리나라를 쓸고간 후여서인지 시골의 나이 많이 먹은 노인네들에 의해서만 전해 내려오는 민요들을 중심으로 채집할 수 있었다. 지역적으로 제주도에서 전해 오는 민요가 가장 정확하게 보존되어 오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일에는 특히 서울국악예술학교 교사들이 적극 동참하고, 뜻있는 각계의 국악인들이 협조하여 주었는데, 지금도 나는 그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해서 전국에서 채보한 민요는 모두 문화재 관리국에 기증하여 국악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우리의 민요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체계화되지 않았던 우리 전래 민요를 한 데 모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성과가 있지 않았나 싶다.

 

가야금병창곡집을 내고

지난 79년, 나는 한 권의 소중한 책을 내게 되었다.
바로 ‘가야금병창곡집’인데 세종음악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가야금병창곡집’은 내가 일생동안 판소리를 해오면서, 또 가야금을 뜯으면서 입에 올렸던 우리 가락을 악보로 정리하여 책으로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가야금 병창곡집을 내게 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국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인 교육방법의 문제 때문이었다.
아다시피 우리의국악은 대개가 구전심수(口傳心授), 즉 교재나 참고서가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교육 방법을 많이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무척이나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21세기를 향하는 이 때에 변변한 교재 한 권 없이 입에서 입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친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못 먹고 못살던 시절, 더군다나 국악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없었던 시절에 행해졌던 교육방법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란 무척이나 힘든 노릇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판소리 수업을 처음에 받을 때, 대구 오포동에 있는 사설 국악 강습소에서 흘러 나오는 단가를 담벼락에 귀를 대고 흥얼거리면서 따라 배웠고, 또 나중에 스승님을 모시고 산사에 들어가 소위 독공이라는 100일 공부에 들어 갔을때도 교재라고는 한 권도 없이 공부했다.
그저 스승님이 부르면 그 뒤를 이어 따라 불렀고, 그렇게 부르면서 가사와 음률을 외웠다. 어쩌다가 한 음이라도 틀리기만 하면 스승님의 회초리 세례를 받아야 했고, 심할 때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경험상 회초리를 맞아 본 결과, 다른 나무로 만든 회초리에 비해서 이 복숭아 나무로 만든 회초리는 그 아픔의 세기가 몇 배는 더하다.
이렇게 스승님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면서도 오직 명창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얼굴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공부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소리, 소리, 소리 공부가 전부였다.
목이 잠기고, 붓고, 나중에는 소리가 목 끝까지 기어들어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공부하면서도 이게 명창이 되는 길이거니 생각했다.
그러면서 감히, 더 쉽게 공부하는 방법을 없을까? 사설을 보고 따라 외우는 방법을 없을까 하는 영리한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에게 이렇게 공부시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사흘도 못견디고 ‘아이고, 아버지 어머니 제발 날 살려주쇼’하고 줄행랑을 칠 게 뻔하다.
물론 과거 내가 스승님에게 공부하던 방식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요즘 학생들은 그전 시절보다 음악적 감각도 빠르고 영리하다. 그러나 끈기가 없다. 개중에는 눈에 띄게 아주 특출난 학생들도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공부 시킬 수 있나 하는 생각은 모든 스승들의 한결같은 생각일 것이다.
양악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위대한 작곡자들에 의해 수많은 음악을 창조해 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스승들 밑에서 얼마나 훌륭한 음악가들이 나왔던가. 합리적인 교육. 그들이 우리보다 음악적 감수성이 나을 것도 없는데, 오늘날 서양음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음악 자료가 풍부하고 합리적인 음악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런 취지에서 가야금 병창곡집을 내게 되었다. 그리고 책머리에 이렇게 썼다.
“이제까지 우리 국악은 보고 듣는 것이 위주여서 시간이 지나고 나면, 형체도 남는 것이 없고 종잡을 수 없었다. 전수를 한다해도 개인의 감흥에 따라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결핍을 올려 놓아 보았다. 그래야만 새시대의 사람들이 배울 수 있고, 후세에 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우리 창(唱), 가락을 양악의 오선보에 맞춘다는 것은 모험이고 논란이 있을 줄 안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 밖에 없다.”

나는 ‘가야금병창곡집’을 내면서 몇 가지 기억되고 언젠가 시정될만한 일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오선보에 음계를 그렸다는 것이다. 오선보는 서양 음계이다. 서양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이 오선보에 의해서 어떤 음이든지 다 소화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음악의 특수성을 오선보에 옮기는 일은 여러 가지로 취약한 점이 많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말하자면, 부득불 이 오선보를 빌리지 않으면 안됐다.
또 한가지는 직접 작곡한 창작곡과 편곡한 민요들만을 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중에는 판소리도 포함 되어 있는데, 이는 가야금 병창의 기본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이 가야금 병창곡집은 내가 그동안 스승님들에게 배워왔던 단가 녹음방초, 백발가 등과 함께, 판소리 사랑가(춘향가), 고고천변(수궁가), 제비노정기(흥보가) 등을 가야금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오선보에 옮겼고, 창작곡과 편곡한 음악까지 실어 놓았다.
책 내용을 약간 소개해 보면, 먼저 가야금의 도해, 그리고 가야금 병창의 연주 형태, 채보에 쓰인 음역과 조현법, 그리고 그 운지 등을 해설했다.
병창이 그렇듯이 악보 또한 노래보는 위에 적고 가야금보는 아래에 적었으며, 사설은 중간에 두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구실을 다하게 하였다.
나는 가야금 병창곡집을 내면서 창작곡집을 만들어낸 최초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는데, 그 뒤 책이 나오고 많은 사람들의 격려의 말을 듣고 정말 부끄러움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아무튼 이 작곡집은 지금도 가야금 병창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에게 중요한 교재로 쓰이고 있는데, 최근에 나는 주위의 권유로 그때 당시 함께 펴내지 못한 판소리 가야금병창곡을 모아 책으로 다시 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채보가 끝나고 출판 제작 중에 있다. 아마 나의 이 회고록이 출간되기 전에 이미 그 가야금 병창곡집은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옹헤야’를 아십니까?

옹헤야, 꽃타령, 군밤타령, 까투리 타령, 새타령 등, 우리 민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꽃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사랑의 꽃이로구나~~’

이 곡들은 모두 나와 우리 국악예술학교 선생님들이 함께 노력해서 만든 작품들이다.
앞서 말했지만, ‘가야금 병창곡집’을 내면서 나는 많은 것을 공부했다.
특히 ‘가야금병창곡집’이 더 의미있었던 것은 내가 스스로 채보하여 만든 민요 창작곡을 실었다는 점이다.
민요 창작곡은 지난날, 민요 채집을 하면서 좋은 곡들을 골라 작편곡을 한 것이다. 전국에서 채집한 민요들은 대개가 농요나, 노동요 같은 것들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일반인들이 따라 부르기 쉬운 곡들이 많았다. 나는 이 민요를 토대로 전문가들에게 악보로 만들고 가사를 정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난날, 민요를 채집하라고 권유했던 분의 말이 생각났다.
“당신이 하는 판소리나 병창은 전술로 내려오는 것이지 창작은 아니잖습니까. 그러나 옳은 예술가가 되려면, 자기 창작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머리 좋은 박여사가 한번 해보시죠.”
“창작요? 글쎄요, 아시다시피 우리 판소리는 전통적인 사설로 내려오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창작으로 하죠?”
“물론 판소리 창작은 아직 어렵겠지요. 제 생각은 우리나라에 쉽게 부를 수 있는 민요가 부족하니, 일단 쉬운 우리 민요를 편곡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신민요를 창작해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국악창작.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나는 우선 민요 몇 곡을 골라서 양악을 전공한 국악예술학교 선생님들과 공동으로 편곡 작업을 했는데 특히 박헌봉 선생과 이병우 선생의 도움이 컸다.
부끄러운 일은 나 자신이 평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왔지만, 전문적으로 음약 교육을 받은 일이 없어서 악보화 하는 일은 능력 밖의 일이었다. 물론 이들 민요 창작곡의 가사는 모두 내손으로 직접 써서 붙였지만, 악보화 하는 과정은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가야금 곡을 연주하면, 그것을 녹음해서 전문가가 악보를 정리하는 식으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생도 많이 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때 도와주신 분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 받는 민요들이 탄생되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해서 탄생한 민요들은 옹헤야, 꽃타령, 뽕따러 가세, 박꽃 피는 내 고향, 임 그린 상사몽, 범벅타령 등 100여곡에 이르렀는데, 내 가야금병창곡집에는 50여곡을 실어서 출판했다.
특히 이중에서 보리타작 소리를 편곡한 옹헤야, 범벅타령, 뽕따러 가세, 꽃타령 등은 방송과 음반을 통해 우리 일반 대중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또 사랑받는 민요이기도 하다.
 꽃타령의 경우는 국악인이면서 국악예술학교 교장을 맡고 계시던 박헌봉선생이 작사하고 내가 작곡했는데, 나중에 대중 가수들에 의해서 불려져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또 옹헤야는 내가 직접 작사 작곡을 한 작품인데, 뒷날 이 옹헤야는 조그만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 알아주던 대중 작곡자가 이 곡을 작곡한 걸로 이름을 걸고 가수들에 의해 방송되고 불려져셔 저작권을 놓고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사실 요즘이야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그런 일이 별로 없지만은 당시만 해도 이 저작권에 대한 인식들이 부족해서 남의 노래를 자기 것인양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혹자는 원래 있던 수많은 민요 중에 하나를 작편곡 해서 불렀다는데 무슨 말이 많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불리워지는데 그걸로 됐지 않느냐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갖은 노력 끝에 전국에 흩어진 민요를 채집하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악보를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작편곡을 거쳐 태어난 민요가 하루아침에 남의 이름으로 공을 뺏긴다는 사실은, 공과를 떠나서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민요를 도둑질한 사람이 당대 알아주는 대중 작곡가였다는 사실은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작곡자는 나에게 사과를 하고 옹헤야는 원래 작곡자인 나의 이름으로 정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작권 시비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사실 돌이켜보면 작편곡은 내가 한 것이지만, 원래 민요의 주인은 대중들 것이 아닌가. 민요는 시대와 사회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자칫 멸종할 뻔 했던 우리의 민요를 다행스럽게 민요채집 연구 조사로 찾아 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 대중들이 애창하고 아끼게 되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나 국악인으로서나 당연히 해야 할 몫을 했다고 본다.
이제 그 민요를 아끼고 보존시켜 주는 일은 우리 대중들의 몫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손을 거친 곡들이지만, 그 주인은 바로 우리 대중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요는 백성 민(民)자를 쓰는 민요(民謠)가 아닌가.
아무튼 이 민요가 자손 만대 세세손손까지 영원히 기억되고 불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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