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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10. 해외에 우리 민족 얼을2022-10-01 16:23
작성자 Level 10

10. 해외에 우리 민족 얼을


일본에 세운 한국 무악원


신문보도를 보니 서구문화와 일본 문화의 침투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지난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분 문화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이 일본 문화를 무의식중에 쓰고 있는 것이 많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우리 말처럼 되어 버린 일본 말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신종 일본 문화가 사회 곳곳에 침투되고 있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특히 한창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소리없이 스며들고 있는 이 외래 문화와 왜색 문화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특히 한창 자라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소리없이 스며들고 있는 이 외래 문화와 왜색 문화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한다.
우리 대중문화계에도 이 일본 문화가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 대중가요라고 하는 노래가 그렇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방인가 뭔가 하는 것도 그렇다. 가라오케가 그렇고 비데오케가 그렇다.
가라오케. 비데오케. 발음도 묘하다. 나이가 들어서 발음도 안되는, 이 어려운 말들을 외우느라 고생 많이 했다.
가끔 제자들 중에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학생들의 있다. 그러면 나는 호통을 친다.
“공부하러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외국에 나가 엉뚱한 외국 박자는 음색을 배워와서 써먹을 생각을 하려거든 아예 나가지 마라.”
그래도 외국으로 떠나는 학생들이 꽤 많다. 특히나 우리 국악을 전공한 학생들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는 이런 걱정이 많아진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위(百戰不危)라 했던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사실 우리가 외래 문화를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보다 더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막연하게 외래문화를 받아들인다면, 자칫 문화 사대주의에 빠질 염려가 다분하다. 외국문화 침투와 왜색문화 이야기가 나오니까 3여년 전에 일본 동경에 한국무악원을 설치하고 78년도까지 운영해 오면서 우리 한국 전통 예술을 일본에 소개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니까 정확히 5.16이 일어나던 해인 61년도 일이다. 일본 거류민단의 단장으로 있던 박수정(朴水正)씨가 재일교포들에게 우리의 민족 얼을 심고 일본 사람들에게는 우리 민족예술을 소개하자는 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박여사. 우리 교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우리 민속 예술학원을 세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포 중에 이런 일을 맡을 분은 안계시고, 박여사가 맡아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글쎄요. 좋은 생각인데요, 제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무슨 말씀을. 박여사께서는 지금 고국에서 예술학원을 경영하고 계시고, 또 국악 예술교 설립을 추진 중이시잖습니까. 아무쪼록 이곳 일본에도 우리 교포들과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 민속 예술의 우수함과 아름다움을 접해볼 기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거류민단 단장 박수정씨의 간절한 제의는 그냥 거절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 우리 민속 예술원을 설치한다. 교포들과 일본 사람을 상대로 말이다. 욕심이 생겼다.
나는 이에 앞서 59년도 9월에 일본 거류민단 본부의 초청으로 한국 민속 예술 가무단을 이끌고 일본 전국을 순회 공연하였고, 무악원을 설치하기로 약속한 이 해에 역시 남편이 운영하던 국제 프로덕션의 초청으로 또 한차례의공연을 일본에서 가지면서, 우리 교포들이 고국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실감하였다.
그래서 한국 무악원의 설치는 교포들에게 우리의 민속 예술을 심어 준다는 취지에서 아주 긍정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무렵 나는 국악예술학교 설립 허가를 맡은 후라서 개인적으로도 매우 뜻있는 일이었다. 또 당시에 남편이 일본에 머물러 사업을 하고 있던 차여서 안성마춤의 기회였다.
우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일을 하든 맨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동경에 한국 무악원(舞樂院)을 설치 한다는 말이 나가자 교포 실업인들이 발벗고 나서서 사업을 추진해 주었다.
동경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하석암(河石巖)씨, 정인학(鄭寅學)씨, 오병수씨, 박수정씨, 니가다씨 등 민단계 실업인들과 언론인 한홍렬 사장, 또 일본에서 연극인으로 활약하던 김파우씨 등이 주축이 되어 사무실과 경비를 마련해서 국악인들을 초청해 주었다.

그래서 예정대로 큰 문제없이 동경에 무악원을 열게 되엇다. 당시 무악원에서 강사로 일을 맡았던 분들은 나와 함께 민요의 안복식(안비취)씨, 가야금의 문경옥(文卿玉)씨, 장고춤의 강문자(姜文子)씨, 민속무용의 이춘자(李春子)씨 등 5명이었고, 나는 여기서 운영대표겸 판소리를 가르치기로 각각 역할 분담을 했다.
이와 더불어 무악원에 국악연구소를 설치하고 운영했는데, 이 연구소는 서울의 국악예술학교와 연계되어 있는 기구로 만들어 일본 내에 우리의 국악연구와 보급을 펴나갔다.
동경에 무악원을 설치하자 많은 교포들이 국악을 배우러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이들을 가르치면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이 되면 공연 무대를 갖곤 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본의 전통민속무인 가부끼만을 공연하는 전속무장에서 국악 공연을 열었던 일이 있었는데, 일본의 전통극만을 올리는 공연장에서 우리의 국악을 공연했다는 사실이 나를 무척이나 흥분하게 만들었다.
또 68년도인가, 무악원 출신 제자들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와 모국 방문 공연을 국립극장에서 열었는데, 아야메상, 우메상이라는 일본인 아가씨들을 비롯 일본인 제자가 출연해 살풀이 춤을 춰서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아무튼 일본 동경에 무악원을 설치한 이후, 나는 일본과 서울을 바쁘게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동분서주했다.

서울에서는 이미 국악예술학교가 창립되어 학교 운영에 적잖이 신경써야했고, 또 운당여관의 운영도 딴 사람에게 맡겨놓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편의 은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남편은 당시 일본에 머물면서 사업을 해오고 있었던 터인지라,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일본 동경에 설치해 우리의 예술을 소개하는 데 노력해 온 한국 무악원은 설치한 지 꼭 18년만인 79년도에 문을 닫았다.
그동안 이 한국 무악원을 통해 배출된 인원만 해도 약 오백여명 에 이르고, 국악연구소를 통해 국악의 교재, 가면극과 창악, 무용, 등에 관한 책자 등을 펴내 한국의 민속 음악을 홍보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단둘이 미국으로 공연 가서


이렇게 일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서울국악예술학교 일과, 여러 가지 공연일로 동분서주하면서 바쁘게 보내야만 했다. 한 달이 멀다하고 일본에 나갔다 들어오면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던 시절, 그 와중에서도 나는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과 구라파 등, 외국공연을 빠뜨리지 않고 다녀야 했다.
사실 나의 해외 공연 기록은 196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우리가락을 전해 준 공식적인 횟수는 약 25회에 이른다.
가깝게는 일본과 동남아를 비롯 미국, 불란서, 서독 등 구라파 지역까지 다니면서 우리 가락을 소개하고 다녔다.
특히 올림픽이나 무역박람회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약방의 가모처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가야금 병창을 비롯 무용, 설장고 등 여러 가지 분야에 재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외국 공연 이야기가 나오니까, 1960년 미국 서카고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공연에 가서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서 열렸던 민속예술대전에는 세게 16개국이 참가했었는데, 관계부서인 상공부의 참가 요청을 받고 떠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외국에 한번 나가기가 참으로 힘들 던 때였다. 더군다나 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는 또 얼마나 어려웠던 시절이었는가.
자유당 정권 말기였던 이 때는 해마다 보릿고개를 겪는 일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던 때였다.
그러던 시절에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무역박람회에 참석하는 일은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지원이 미약한 가운데 출발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형식적인 참가에 만족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따라서 예술단의 규모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규모였다. 단원은 나와 나의 제자인 강문자(姜文子)양 단 두 사람 밖에 없었는데, 다시 말하면 세계무역박람회에 한국이 참가했다는 의미만을 부여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단장도 통역관도 없었다.
강문자는 고전무용을 전공했는데 구고무에 특히 뛰어났었다. 당시 그녀의 춤사위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을 떠날 때는 정말 막막했다. 통역관도 없이 여자 단둘이서 물 설고 낯설은 곳으로 떠났으니 오죽 답답했겠는가.
아무튼 강문자와 나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지금은 미국으로 직행하는 비행기 편이 많이 생겼지만, 예전에는 미국을 가려면 일본을 꼭 거쳐야 했다.
하네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 탄 우리는 처음 가보는 미국행에 가슴이 떨려옴을 느꼈다. 이륙한지 30분쯤 되었을까. 갑자기 비행기가 하늘로 쏜살같이 올라가는데, 비행기 여기저기서 “아이고” 하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나는 가슴과 창자를 누르는듯한 뭔가가 찢어지는 고통스러움을 맛보아야 했다.
“윽. 문자야 갑자기 이거 뭐꼬?”
강문자도 마찬가지였다. 뿐만 아니고 비행기 안에 있는 승객들은 모두가 고통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고, 문자야. 미국은 커녕, 이역만리 태평양 상공에서 죽을 모양이다.”
신음은 계속되었다. 뭐가 잘못 되었을까. 그러기를 십여분, 비행기는 계속 위로만 올라갔다. 그후 다시 비행기는 정상으로 돌아 왔는지 수평을 유지했는데, 나중에 스튜어디스 말로는 심한 기압차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그후로 수십 차례의 해외 공연을 다녀 보았지만, 그때 미국행 비행기에서 겪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질 않았다.
해외공연을 많이 다니면 항상 사고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대의 여류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화중선씨도 일본 순회 공연 도중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큐우슈(九州)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언젠가 한번은 남미 쪽으로 공연을 갈 때였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간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객이 180명이 죽었다는 사고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주책 맞은 소린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앞 비행기를 탔다면 우리는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래서 나는 그 후부터는 어쩌다가 비행기를 타게 되면, 제발 아무 일 없이 목적지까지 도착시켜 달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곤 한다.


 

코리아 댄싱 원더풀


시카고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우리 민속예술단 대표는 강문자와 나 이렇게 비록 단 둘이었지만, 우리의 대표가 민속예술축제에서 공연한 내용은 아주 호평을 받았다.
민속 예술제전은 11일안 계속되었다. 그 때 박람회의 하루 입장 인원은 10만명을 헤아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루에 6차례씩이나 공연을 했다.
우리 대표의 공연 내용이 인기를 끌자 박람회장 내 안내 방송에는 ‘코리아의 가야금-댄싱’이 제일 볼 만한 프로라고 계속 소개해 주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많은 관람객들은 우리의 공연을 보면서 원더풀 코리아 댄싱을 연발했다.

강문자양과 나는 신이 났다. 연일 계속되는 공연으로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지만, 코 큰 외국인들의 우뢰같은 박수 갈채를 받을 때 마다 어깨가 절로 으쓱거려졌다.
이렇게 우리 공연이 인기를 끌자, 그 제전에 참가한 프랑스, 스페인 팀과 함께 우리 대표는 미주 전역에 중계된 TV 방송에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동양의 작은 나라. 6.25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로만 알고 있는 미국 사람들에게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의 예술을 보여 준 것이다. 그들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5천년의 긴 역사를 지닌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우리 대표가 그때 외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것은 템포가 빠른 우리 무용의 단머리와 시산조시에 북춤을 추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 팀은 이에 반해 정적으로 느린 부채춤을 추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템포가 빠른 우리 팀의 공연이 환영받지 않았나 싶다.
당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공연 사흘째가 되던 날인가, 공연을 주관하던 미국인 매니저가 공연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자꾸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한번도 아니고 수 차례를 하길래, 나도 장난삼아 공연을 하면서 윙크를 받아 주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미국인 매니저는 통역을 앞세우고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제자 강문자는 코 큰 미국인의 방문에 깜짝 놀라서 내 뒤로 숨었고, 나도 어제 공연 도중에 장난삼아 보냈던 윙크를 이 사람이 오해한 게 아닌가 해서 잔뜩 긴장을 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공손히 물었다. 그 미국인은 알 수 없는 말을 떠들었고 우리는 한동안 통역관의 말을 기다려야 했다.
“이분께서 한국 대표의 공연을 아주 감명깊게 보았다면서 미국 일대를 돌면서 6개월 kfid 공연을 같이 할 수 없냐고 묻는군요.”
“네? 미주지역을 돌면서 6개월간 공연을 해요?”
“네, 그리고 당신들 뿐만 아니고, 같이 공연할 한국인이 있다고 합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가수 이난영씨의 딸 김씨스터즈도 당신들이라면 같이 공연하겠다고 한다는군요.”
“글쎄요, 저희들은 한국 정부가 파견한 민속예술 대표라서 그런 문제가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며칠 더 생각할 여유를 주시지요.”
미국인은 답을 기다리겠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그 후 나는 한국 문공부 공보관으로 와 있던 친한 미국인이 거기에서 일을 보고 있다기에 그를 찾아 갔다.
“글쎄요, 우선 미국에서는 흥행 계약을 할려면, 반드시 변호사를 선임해서 계약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공연 사례비를 떼이는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또 그뿐만 아니고 언어 소통이나 생활 면에서도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불편할텐데 괜찮겠습니까? 혹시 그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유혹 하는지도 모르니 잘 생각하십시오.”
그 말은 맞았다. 물설고 낯설은 이역만리에서 친분도 없는 외국인 매니저를 어떻게 믿고 공연을 한단 말인가.
나는 다시 그를 만나 사정상 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만일 내가 그때 그 매니저와 공연 일이 성사되었더라면 지금쯤 미국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그 매니저의 제의에 호기심이 끌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 한창 때의 젊음 탓이었으리라.

 

우리의 민족 예술을 살려야 한다

흔히 외국에 나가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카고에서 열렸던 세계 무역박람회의 민속예술 공연 참가는 개인적으로 나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단 두사람이 세계민속 예술대회에 참석해 고군분투한 것은 순전히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우리의 속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물설고 낯설은 이역만리 미국에 한국의 민속예술 대표라고 단둘이 참가해서 공연을 해야 했던 기분은 실로 참담한 것이었다.
아무리 우리의 민속예술이 천대받고 수모 당하며 살아왔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명의 예술단을 이끌고 참석한 여러 나라들을 보면서 문득 왈칵 밀려오는 서러움을 느껴야 했다.
왜 우리 민속예술 대표단은 고작 2명 밖에 오지 못했는가. 이는 국력이 약해서만은, 경제력이 약해서만은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문자와 내가 그 이역만리 시카고에서 악을 쓰면서 우리의 전통 예술을 그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려고 애썼던 이유는 이런 오기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귀국 후, 나는 모 일간지에다가 ‘국악의 해외진출을 위하여’ 라는 제목으로 시카고 무역박람회민속예술 제전 참가기를 투고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위정자들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민족문화의 보호니, 육성이니 하면서 부르짖고 있으나 이는 말로만 그치고 실제로는 하나도 실행하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하겠다.
국악은 우리 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술로서 세계 어느 나라 민족 예술에 견주어 보아도 그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7월에 미국 시카고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16개국 예술단이 참가한 국제 민속예술대회가 있었는데, 나와 강문자양이 이 대회에 초청을 받고 참가하여 각국의 민족 예술단과 더불어 우리도 우리나라의 민족예술을 자랑할 기회를 가진 바 있다.

이 대회에서 우리의 가야금 병창, 장고무, 구고무 등이 인기를 독점하여 결국 우리와 프랑스, 스페인 3개국만이 선정되어 텔레비전 출연까지 하였다.
우리 예술단은 다만 두사람 뿐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숫적으로 가장 적었고, 또 경비 관게로 안내자도 없어, 그곳의 풍습과 대회 참가 절차 등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으나, 그래도 우리의 민족 예술만은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앞으로 당국은 민족 예술을 부흥시키겠다고 구두로서만 그치지 말고 진실로 국악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진흥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의 민족 예술단을 끊임없이 해외에 파견하여 우리의 민족 예술의 진가를 세계에 소개하도록 힘쓰는 한편, 가급적이면, 각국의 민족 예술단을 우리나라에 빈번히 초청하여 국제 친선과 문화 교류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의 민족문화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
감정적인 문구도 있지만, 사실 그때 나의 기분은 정부당국과 위정자들의 행태에 대해 거의 분노감 같은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땅이 어떻게 이어져 지켜온 나라인데, 그리고 우리의 문화유산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데, 외국 것만 보면 사족을 못쓰면서도 우리 것은 천대한단 말인가.
국악에 대한 당국의 몰인식, 그리고 무성의한 정책이 답답하기만 했다. 특히 우리의 전통 예술을 이어가는 국악인들에 대한 소홀한 대접이 가슴이 아팠다.
더욱이 이런 풍토에서 당시에 미국 시카고까지 날아가 우리 문화를 소개하러 가서, 단 두사람이 공연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 올 때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회한과 슬픔으로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기억나는 해외공연들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무역박람회에 참석한 지 2년 후인 62년, 나는 프랑스에서 열린 제 9회 프랑스 파리민속대제전에 국악인 16명과 함께 대표로 참석해 유럽에 우리의 한국 에술의 진가를 보여 주었다.
당시 함께 간 일행들 중에는 무용가 김백봉(金白峰), 전황씨, 창에는 김소희, 이생강, 한영숙, 김문숙씨 등이 참가했다. 우리 일행은 프랑스의 파리를 거쳐 이태리의 로마, 그리이스의 아테네, 터키의 앙카라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공연을 했다.
파리에서의 첫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 감명이 깊었다. 당시 나는 농악에 설장구를 쳐서 그들에게 우리의 예술을 선보였는데, 공연이 끝나자 그 코 큰 외국인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며 앙콜을 외쳤다.
5천년 역사의 우리 민속 예술이, 동양의 신비한 나라 코리아에서 온 민속 예술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해외공연을 해보면, 우리의 민속 무용은 전통적인 창의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쉽게 이해되는 것 같으나, 판소리 같은 창은 가사 전달이 어려워서인지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된다.
사실 판소리는 소리하는 사람과 고수 두사람이 펼치는 것이고, 소리하는 사람이 아니리와 창을 바탕으로 관객들이 그 소리에 몰입함으로써 추임새를 넣어야만 하는 자유분방함을 요구한다. 그러니 서구인들에게 이런 공연 내용이 쉽게 먹혀들지 않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리하는 사람들의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우조(羽調)의 정중하고 웅화심장한 멋과 성음, 그리고 미려청고(美麗淸高)하고 애원 처절한 멋을 공감할 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흥미를 줬던 것은 악기, 즉 가야금을 곁들인 판소리나 단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사물놀이처럼 우리 농악을 이용한 타악이나 완벽한 선의 예술을 보여 주는 무용은 그들에게 상당한 감동을 주었다.
나의 가야금 병창은 해외공연 어디서든지 환영을 받았는데, 아마 그들은 노래를 하면서 악기를 뜯어대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외국인들은 어떤 음악이든지 장르가 엄격하게 구별되어 있어 성악이면 성악, 기악이면 기악, 이런 식으로 전공분야가 모두 다르다. 즉 다시 말해서 피아노를 치면서 성악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기 때문에 가야금을 뜯으면서 소리를 하는 나의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이후, 프랑스 파리 세계민속예술대전, 동경올림픽 세계민속예술제, 일본 엑스포70 만국박람회, 서독 뮌헨의 올림픽 민속예술대전, 테헤란 국제 무역 박람회, 캐나다 몬트리얼 올림픽 등 수많은 해외 공연을 다녀보면서 느낀 감정이지만, 우리 민족 예술을 공연할 때마다 항상 위대함을 느낀다.
사실 우리나라가 유럽 쪽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88올림픽을 치루면서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동안 수 차례 외국공연, 특히 유럽공연을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우리나라가 유럽에 너무나 소개가 안됐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예술단이 유럽 쪽에 공연을 나가면, 주로 우리나라를 선전하기 위한 공연을 많이 했다. 이러한 공연은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쪽에서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민속예술단은 호기심으로 지켜본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프랑스와 로마, 스웨덴을 돌면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하루는 우리가 한복차림으로 화장을 하고 거리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복을 입은 우리 모습들이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이채롭게 보였던지 수십명의 사람들이 사진기를 들고 우리를 찍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뒤에 돌아가서 사진을 찍는 그들을 찍어댔는데, 뒤늦게 자기들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72년도에 뮌헨 올림픽을 마치고 영국의 런던 등지를 돌면서 공연을 할 때 영국의 유명한 예술 평론가가 유수의 신문인 <더 타임즈(The Times)>에 썼던 기사가 생각난다.
그때 그 평론가는 ‘한국의 고유 예술은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달리 독자적인 예술로 관객들에게 극적인 감명을 주었다.’라고 썼다.

72년 뮌헨 올림픽의 민속예술제전에 참가했을 때의 우리 대표단은 상당히 많은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용팀으로는 한영숙, 전황, 송범, 김문숙, 강선영, 한순옥, 최희선 씨 등을 비롯한 대학 무용과 학생 40여명과, 국악팀으로는 김소희, 이생강, 박범훈, 김영재, 이영희씨 등 총 60여명에 이르렀다.
그 때 당시 단장으로는 임병직씨, 문공부 총책은 이종덕씨, 그리고 조선생이라는 분으로 생각난다.
조선생이란 분은 우리 예술단의 경리 업무를 맡아 보았는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처리해 주어서 무척 인상에 남는다. 그와 함께 올림픽 공연이 끝나고 유럽을 돌대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조선생은 당시 나이가 45세 가량이었는데, 고향은 경상도였다. 직장 관계로 서울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해 우리 일행들을 항상 웃음 꽃으로 몰아 넣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 조선생이란 분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하루는 나하고 김소희씨를 보고 좋은 곳에 구경가자는 것이었다.
“김선생님, 박선생님, 우리 말입니더, 경치좋은 유럽까지 왔는데예, 어디 좋은 공원에라도 가서 구경 쪼까 허고 오입시더.”
그래서 김소희씨하고 나는 나란히 손을 잡고 조선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럽의 공원이 대개가 그렇지만, 경관이 잘 꾸며져 있고 깨끗해서 유럽에 처음 오는 관광객들은 사진기를 눌러 대느라 정신 없다고 한다.
조선생은 어느 멋있는 공원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 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
“아이고, 박선생님, 김선생님.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오이소. 이리 와서 사진 한 장 박읍시더. 아, 그쪽 말고예. 이쪽으로 오이소. 기왕이면, 숲 좋고 물 좋은데서 박읍시더.(사진을 찍자는 말)”
조선생은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인데, 우리는 그 사투리를 듣고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결국 사진도 못박고, 아니 못찍고 웃다가 돌아 왔다.
이거 늙은이가 괜히 주책없이 이상한 소리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 후 뮌헨 올림픽이 끝나자 파리를 거쳐 영국, 스웨덴, 독일을 거쳐 동남아로 떠났다. 김소희씨는 독일의 본에서 우리와 헤어져 한국으로 귀국했고, 나는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리는 해양 박람회에 참석하러 떠났다.
그때 당시 우리 일행은 김덕수 사물놀이패, 그리고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졸업한 제자 무용수들이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는 그때 당시만 해도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팀이었지만, 우리 학교(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많은 후원을 해주고 있었다.
나는 뮌헨에서 인도까지 혼자서 비행기를 타고 16시간을 날아갔다. 그리고 시작한 공연은 약 한 달가량 계속 되었다. 당시 무역진흥공사 사장은 우리들의 공연 덕분에 판매 수입이 1백만불 이상이나 증가됐다면서 나중에 감사장까지 전달해주었다.
한 달 동안의 공연은 성황리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단원들의 고생은 무척 심했다. 인도는 아다시피 우기가 길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벌레가 곤충들이 득실거리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 단원들은 한달동안 인도에서 합숙하면서 ‘비얌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우리가 합숙하던 바로 옆집에는 다른 공연단체가 들어와 있었는데, 바로 그들 방에 뱀이 들어 왔던 것이다. 모두가 잠자는 저녁에 어디서 들어 왔는지 이 뱀이란 놈이 방안을 누비고 다녔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이 ‘비얌 사건’ 이후로 단원들은 뱀이 들어올까봐,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매일 저녁마다 취침 전에 온 방안을 작대기로 뒤적이며 수색(?)을 했고, 서로 돌아가면서 보초를 서기도 했다.
아무튼 인도 공연은 뱀 공포와 함께 기억될만한 것이었다. 이후 우리는 두 달여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3개월여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민속 가무 예술단을 이끌고

62년도 일로 기억되는데 나는 이 해에 ‘한국민속가무예술단’이라는 민속 예술단을 창단했다.
내가 ‘민속가무예술단’을 창단하게 된 것은 그동안 몇 차례 해외공연을 다니면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급조된 공연단이 아닌, 평소에 훈련되고 호흡을 맞추면서 공연할 수 있는 조직적 인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 예술단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국내외적으로 보급하고 전승시킨다는 취지였다.
62년 정월. 나는 ‘한국민속가무예술단’이라는 명칭으로 예술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나는 창단 기념으로 단원들을 이끌고 일본 전역을 순회 공연하게 되었다. 마침 이 당시 순회 공연을 끝내고 어느 잡지에 우리 예술단의 활동 상황을 쓴 기고문이 있어서 소개한다.

“우리 민속가무예술단이 재일교포 위문과 한일 친선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떠난 것은 지난 1월 22일이었다.
우리 일행은 판소리의 김연수씨를 비롯, 이병우, 이은관, 고백화, 강문자, 한일섭, 김정구, 장세정, 장연찬씨 등 20여명이었다.
우리 일행이 북구주(北九州)에 있는 고바다시(戶畔市) 시민홀에서 첫공연을 가진 것은 일본에 도착하지 나흘 뒤였다. 이날은 눈이 마구 쏟아졌다. 폭설이었다. 눈이 내리는 거리에 교통마저 끊기는 험한 날씨였는데도 시민홀은 대만원이었고, 복도까지 관람객들이 메워졌다.
우리 일행이 펼친 승무(僧舞), 구고무(九鼓舞), 가야금 병창, 농악 등 한 프로가 끝날 때마다 장내는 환호성과 박수소리로 그야말로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였다.
며칠 는 구주(九州)에서 제일 큰 도시 후꾸오까(福岡)시에서 공연이 있었다. 후꾸오까 시는 당시만 해도 우리 교포가 약 5만여명 살고 있었다. 공연 장소는 다이하구(大博)극장. 이 극장은 일본의 국악인 가부끼(歌舞妓)의 전속 극장이었다. 일본엔 이 가부끼를 전문으로 하는 극장이 전국 각지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조그마한 국악 전용극장 하나 없을까. 나는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의 가부끼 전용 극장을 보면서 부럼우르 느꼈다.
가장 감격적인 것은 개막하기 전에 우리 태극기와 일분의 국기를 중앙에 달아 놓고 우리 애국가만 봉창하던 때였다. 첫 구절이 끝나기도 전에 장내는 울음바다를 이뤄 버렸다.
당시에 조련계(朝聯系)도 많이 입장하였다기에 적이 염려도 되었지만, 장내는 감격에 넘쳐 부르는 애국가의 코러스로 가득찼던 것이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꾸오까의 한 교포는 공연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조련계를 통해서 가끔 북한 예술단이 이곳을 방문하는데, 그 공연 내용을 보면 판에 박은 듯합니다. 개막하면서부터 시사 강연에 내용도 사회주의 선전이죠. 우리 민속 예술을 보러 왔다가도 그런 내용이 나오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민속 예술단을 대하니 순수 예술인데다가 저치성이 없으니 기분이 아주 유쾌하고 기뻤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곳에 구경온 많은 조련계 교포들도 우리 공연을 보고 향수를 불러 일으켰으리라 믿는다.
농악 장면 때는 십여명의 관중들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우리와 같이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객석은 객석대로 농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농악은 일종의 군무(群舞)이기 때문에 박수와 화기가 넘치는 가운데 출연자와 관중이 함께 뭉쳐준다. 그만큼 농악은 즉흥적이고 신바람 나는 우리 예술이다.”

 

우리의 후꾸오까 공연은 8.15 이후 처음 보는 대성황이었다고 한다.
사실 민속 예술 가무단을 창단하고 일본에 사는 우리 교포들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이었지만, 나는 이 공연을 통해 우리 교포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그 후에도 나는 이런 공연을 몇 차례 더 다닌 적이 있는데, 일본 공연은 교포가 많아서 그런지 항상 공연을 열 때마다 감격스럽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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