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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9. 역사의 격변기를 헤치고2022-10-01 16:22
작성자 Level 10

9. 역사의 격변기를 헤치고


예술학교를 세우기 위해


6.25의 참화가 지나가고 나자, 부산 피난지에서 활동하던 우리 ‘여성국악동호회’는 일년여 정도를 전국으로 돌아 다니며 공연활동을 했다. 그러나 6.25가 지나고 어렵게 생활하던 때라 사람들은 우리들의 공연에 눈을 돌릴 수 없던 때였다.

자연히 공연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서울에 들어와서 우리 단체를 후배인 김경애씨에게 무상으로 넘겨 주고 김소희 형님과 함께 지금의 돈암동 전차 종점 부근에 있는 적산 터 700여평을 인수하여 예술학원을 짓고 3년여 동안 운영하였다.

사실 이 때 학원을 낸 것은 우리 국악인들이 당장에 공연활동의 중단으로 인해 생계문제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았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긴 했지만, 해방 직후부터 국악을 전승하고 가르칠 수 있는 학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항상 머리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내가 여성국악동호회를 이끌고 활동하던 무렵, 박헌봉(朴憲鳳)선생을 비롯, 박초월, 김소희, 박소군, 성금년, 지영희, 한영숙씨들과 함께 민속예술학원을 내보려고 추진했었지만, 6.25로 인해 흐지부지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돈암동에 낸 학원은 의외로 반응이 좋아 3년 동안 약 380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주로 강습을 하였던 분야는 판소리, 무용, 가야금 등이었는데, 그때 학원에서 교사로 일하셨던 분들은 창악에는 김소희, 지금은 고인이 된 박초월, 김여란, 그리고 나였고, 가야금 병창 민요에는 역시 고인이 된 김옥진, 무용에는 고 한영숙, 연극에는 남민선생 등이었다.
교사들이 알아준다는 명창 명인들이서였는지, 돈암동 학원은 연일 몰려드는 학생들로 만원을 이루었는데, 이렇게 학생수가 많아지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학생들은 갈수로 늘어나고 장소는 비좁고 큰일이네. 학원을 옮기든지 무슨 수를 써야겠는데. 가만, 이럴 게 아니고 이왕 이렇게 학생들이 많아지는데,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보는 거야.”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김소희 형님과 한영숙씨에게 이 일을 의논하였다.
“그거 무척이나 좋은 생각일세. 그나저나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자고 뜻을 모으다가 그놈의 전쟁통에 풍지박살이 났는데,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네.”
김소희씨의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국악예술학교 설립 계획은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박헌봉 선생이 병환으로 청진동에 있는 대심여관에서 누워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문안을 갔다가 학교 설립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박헌봉 선생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면서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학교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참으로 좋은 생각 하시었소. 내 비록 자리에 이렇게 누워있지만, 박여사의 말을 들으니 금방 이 자리를 일어날 것 같소이다. 그거 말로만 하지 마시고 꼭 추진하시오. 나도 몸이 완쾌 되는 대로 참여할테니, 꼭 추진해야 되오.”

국악예술학교.
많은 국악인들이 얼마나 못배운 한이 뼈에 사무쳤던가. 못배워서 받았던 설움. 그 설움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우리는 비록 못 배웠지만 우리 후학들에게는 체계적인 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기필코 만드리라. 
나는 그때 당시 국악협회 이사직을 맡고 있었는데, 국악협회 이사직이라는 중책을 맡고 보니 이러한 결심은 더욱 커져갔다. 국악인들의 소망을 담은 국악예술학교 설립은 이렇게 해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이다.

곧 이어 예술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되었다.
그때 예술학교 설립 기성회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했다.
기성회 이사장직은 전남방직 사장인 고 김용주씨가 맡아주셨고 국악인들 중에는 김소희, 박초월, 김여란, 한영숙씨 등과 박헌봉 선생이 이사로 참여하였다. 지금은 세상을 뜨셨지만, 고 박헌봉 선생은 예술학교 설립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이고, 나중에 우리 국악예술학교 초대 교장으로 많은 노력을 해주신 분이다.
뒤에 다시 하겠지만, 박헌봉 선생은 경남 산청 출신으로 창악인이 아니면서도 우리 국악 발전에 공로가 많은 사람이다. 서울 중동학교를 나와 경남 진주에서 국악과 풍류를 좋아하던 김덕천(金德天)씨에게 판소리를 익혔고, 그 뒤에 일제 치하에서 이왕직 아악부와 조선 음악협회 조선악부 상무를 지냈으며, 6.25 후에는 문화재 관리국 예술위원, 국악원장 등을 지내면서 한평생동안 국악 발전을 위해 애쓰신 분이다.
이렇게 국악예술학교 설립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돈이었다. 우선 지금 현재 쓰고 있던 예술학원을 매각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돈암동 학원을 매각하였더니 당시 돈으로 1천 7백만원정도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돈으로 학교를 만들기에는 어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우리 예술에 관심이 많은 기업인들을 찾아가 기부금을 받기로 작정했다.
첫 번째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찾아 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사정을 설명하였다.
“지금 여러 국악인들이 힘을 모아,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있는 돈이라고 1천7백만원 밖에 되질 않습니더. 도와 주이소.”
마침 당시 삼성의 상무이사를 지내던 허정구씨가 옆에 있다가 대뜸 하는 말이,
“참으로 대견한 생각이십니다.. 그래 얼마나 있어야 되겠습니까.”
“송구스럽게도 많을수록 좋겠지만, 여러 기업인들의 찬조를 받고 싶으니, 성의껏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국악 발전과 2세 교육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시는데, 어찌 마다하겠습니까. 액수가 성에 찰지 모르겠지만 성의껏 도와드리죠.”
그러면서 그때 돈으로 1천3백50만원을 기증해 주었다. 당시 돈으로 1천3백50만원이면 참으로 큰 돈이었다.
힘이 저절로 솟아났다. 그리고 희망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여러 기업들을 방문한 결과, 기부증서에는 삼양사 김연수씨, 전남방직 회장인 김용주씨, 경성방직 김용완씨, 조선일보 회장인 방일영씨, 황청하씨, 고 전영순씨, 당시 서울은행장 윤병호씨, 은행집회소장 손대순씨, 재무장관을 하시던 이중재시, 코오롱 회장인 이원만씨, 그리고 현재 회장인 이동찬씨 등이 도와주었다. 또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던 교포 김양조씨라는 분도 500만원을 내주셨고, 이외에도 각계 각층에서 많은 돈을 각출해주셨다.
이렇게 해서, 우리 예술학원은 돈암동에서 관훈동으로 터를 넓혀 이사갈 수 있었다. 관훈동의 한국민속예술학원은 건평 5백평 규모의 2층 건물이었는데 학교라고 부르기에는 초라한 규모였지만, 그래도 우리 예술학교 기성회는 정식 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문교부와 각계 인사들을 만나러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운 것이 바로 서울국악예술학교이다. 뒷날 우리 예술학교가 정식 인가가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동료들을 부둥켜 안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운당여관과 나

몇 년전 국악예술고등학교를 이전하기 위해, 부지확보에 필요한 돈이 모자란다는 말을 듣고 나는 몇십년 동안 정들었던 나의 집이자, 운당여관을 서울국악예고에 기증했다. 부동산 시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히도 운당여관을 매각하여 나온 돈이 26억정도 되어서 학교 부지 확보와 준공에 어려움을 덜었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운당여관(雲堂旅館).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수십여년 동안 국악의 길을 걸으면서 여관을 운영해 왔다.

내가 여관을 운영하게 된 동기는 간단하다. 6.25가 지나고 서울에 다시 들어와 공연활동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모든 것이 예전처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극장은 포탄에 맞아 부서져 있었고, 사람들은 먹고 살기에 바빴다.

물론 나도 내 나름대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물론 전쟁 전에 여성국악동호회를 이끌면서 ‘햇님달님’으로 흥행에 성공해 약간의 돈을 모으긴 했지만, 상황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무작정 집에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몇몇 아는 경제인들을 찾아가 자문을 받기로 했다.
“우리같은 예술인들이 부업을 한다면, 무슨 사업을 해야 안전할까요?”
그랬더니 어떤 분 말씀이 여자가 사업을 하기는 좀 벅찰테니까, 여관을 해보라고 권했다. 여관을 하면, 큰 돈을 못벌겠지만, 그런데로 식생활은 해결할 수 있을거라는 이야기다.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운당여관이다.

운당여관 건물은 원래 120여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구한말에 환관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6.25가 터지기 전인 48년도에 당시 장안의 세도가인 한상억씨에게서 사들였다. 한사억씨는 당시 장안의 알려진 상당한 갑부였는데, 무슨 까닭이었는지 빚에 몰려 집을 내놓은 것을 우연히 내가 사게 된 것이다. 그는 6.25때 납북되었다고 한다.
내가 애초에 이렇게 큰집을 구입하게 된 동기는, 나중에 제자들을 가르치고 국악인들과 교우를 하면서 지내기 위해 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6.25를 거치면서 생계를 위해 부득불 여관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여관이 나중에 국악예술고등학교 교사 건립에 효자노릇을 했으니 참으로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관을 개업할 무렵, 나는 작명가에게 상호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작명가는 이리저리 좋은 이름들을 몇 개 뽑아 주었다. 그러나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예로부터 장사는 상호가 좋아야 한다던데요.”
“글쎄요, 박여사님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이걸 어떡하죠.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이 동네가 운니동이니까, 운니동의 운(雲)자와 집당(堂)자를 써서 운당(雲堂), 운당여관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운당여관.”
운당여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관 운영은 잘 되었다. 손님들도 많았고, 예술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다. 손님이 많아지고 장안의 명소로 각광 받으면서 여러번 여관을 손보아야 했다.
원래 이 건물은 여섯 채였는데, 74년도인가 정릉에 있던 윤비(尹妃)의 별장이 헐린다는 말을 듣고 그 건물을 고스란히 옮겨와 여관은 한옥 일곱채와 대지는 450여평으로 넓어졌다.
손님이 많았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어떤 분은 이 자리가 명당이어서라고 한다. 언젠가 조금 알고 지내던 지관 한분이 집을 방문해서 하는 말이
“여기 여관 주변에 차가 다니는 길이 네 군데로 뚫려 있는데, 밤 열시가 되었는데도 소음이 들리지 않는군요. 이걸 보고 명당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나서 정말 가만히 생각해보니, 집앞에 길이 사통팔달로 뚫려 있는데, 지금까지 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운당여관은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더 잘 알려진 여관이었다. 집이 전통 한식이고 또 고풍까지 서려 우리 문화를 만끽하려는 외국인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일본의 NHK 방송국에서 한국의 전통가옥이라는 제목으로 운당여관이 소개되었는데, 우리 운당여관은 한국을 가는 관광객이라면 한번쯤 꼭 들려야 할 곳이라고 소개해 주어 기분이 좋았다.
또 운당여관하면, 바둑계의 명승부의 산실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이야, 관철동에 번듯한 건물로 한국기원이 들어 서 있지만, 한국기원이 셋방살이를 하던 시절, 국내 유수의 프로 국수전 대부분이 우리집에서 열렸다. 조남철, 김인, 조훈현 등을 비롯, 내로라하는 한국 바둑계의 제왕들 치고 우리집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운당여관을 운영하면서 나는 조석식(朝夕食)을 꼭 내 감독하에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예술인들이나 정객들이 우리집을 많이 찾았다.
지난 89년도에 국악예고 이전을 위해 부득불 이 여관을 내놓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이야기를 들엇다. 물론 집을 내놓는 나도 정든 집을 처분한다는게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못배운 한을 달래기 위해 우리 국악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국악에고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31년간 운영했던 운당여관의 상호는 이렇게 내려졌다. 다행히도 운당여관의 건물은 몇 년전 양평에 건립된 영화 촬영소로 그대로 옮겨져 복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장안의 명소가 헐린 데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건물 자체는 양평의 영화 촬영소에 새로 새워져 있다고 하니, 그나마 위로가 된다.
작년(91년) 운당여관은 내가 기거하는 별채만을 놓아두고 몽땅 헐리고, 그 자리에 신식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새로 들어선 빌딩은 오피스텔이라고 한다. 연전에 나를 취재 온 아무개 기자가 오피스텔도 알고보면 일종의 사무실 여관이라고 하던데, 결국 이 운당여관 자리는 한옥에서 신식 빌딩으로 모습을 바꾼 셈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지금 나는, 내가 그전부터 살고 있었고, 또 여생을 보내기 위해 남겨 놓은 운당여관의 일부인 자택에서 말년을 운신하고 있다.

 

 

새사람을 만나서

사람들에게는 흔히 일생을 통해서 몇 번의 기회가 온다고들 한다. 그 기회는 물론 여러 가지겠지만, 흔히 공부할 수 있는 기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 등등이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는 국악예술학교를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국악 후원자들을 찾아 나섰고 문교부를 드나들면서 설립인가를 받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니까 1955년부터 5년동안 나는 모든 힘을 학교 설립에 기울이고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학교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틈틈이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외국공연도 다니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윤길병씨를 만나게 되었다. 윤길병씨는 그때 당시에 일본에서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많은 일본 연예인들을 상대로 흥행사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에 민단의 단장으로 있던 박수정씨로부터 우리 교보들을 위해 민속 예술 공연을 열었으면 하는 제의를 받았다.

일본에는 수십만이 넘는 우리 교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때 당시만 해도 일본과는 국교가 단절된 상태라서 정식적인 문화 교류가 사실상 금지 되어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에 우리의 민속예술을 보여주기 위해서 비자를 얻으려 했으나 뜻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승만 대통령이 내가 춘향전을 가지고 일본에 공연을 나가려고 한다고 하니, “다른 것은 몰라도 부디 우리 민족 예술의 우수성을 맘껏 소개 해주시오.” 하면서 허락해 주었다.
일본에서의 춘향전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우리 민속 가무단은 동경을 비롯해서 오오사카, 나고야, 나가사키, 고베, 큐우슈, 북해도 등지를 돌면서 우리 한국예술을 선보였다. 나는 이무렵 어느 연회장에서 윤길병씨를 만나게 되었다.
윤길병씨는 남자다운 외모와 깍듯한 예절로 나를 사로잡았다. 물론 그쪽도 마찬가지엿다. 그러나 나는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첫결혼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그 후 윤길병씨는 나에게 청혼을 하였다.

윤길병씨와의 결혼은 많은 망설임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첫결혼에 실패했다는 초조감은 윤길병씨와의 만남에서 상당히 큰 장애가 되었다.
물론 내 스스로 느끼는 것들이었겠지만, 윤길병씨는 나의 그런 상황들을 잘 이해해 주었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그건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포근한 같은 것이었다. ‘그래 재혼하자. 이 남자라면, 나를 평생동안 돌보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가슴속에서 밀려 오는 애틋함같은 것이 나를 충동질했다. 나는 결국, 서른 여섯되던 해에 윤길병씨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 학교 설립으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뛰어 다닐 때였다. 문교부에서 학교 설립 허가는 나오질 않고 재원마저 부족한상태에서 나는 몇 번씩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여보,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학교 설립이고 뭐고 다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요. 예술인이 예술이나 열심히 했으면 됐지 무슨 학교에요.”
“그렇게 약한 맘을 먹어서야 쓰나. 내가 아는 당신은 아주 오기도 있고 한번 한다면 끝을 보는 사람으로 아는데,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거 아니오? 학교 만드는 일이 그렇게 쉬우면 아무나 다 학교를 만들게 아니오. 그러지 말고 용기를 갖고 추진해 보시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면 힘껏 도와 주겠소.”
힘이 났다.

그래, 대구 칠곡 촌에서 명창이 되겠다면서 어머니의 만류마저 뿌리치고 뛰쳐나와 이렇게 우뚝 섰지 않았던가. 그런데 못배운 국악인들의 설움을 풀어보겠다고 학교를 세운다는데, 그까짓 아무것도 아닌 장애물에 좌절을 해? 그래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예술학교 설립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
남편의 뒷바라지는 나를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예술학교를 관훈동으로 옮긴지 2년 뒤인 1960년 3월, 문교부에서 정식으로 설립 인가가 남으로써 그 결실을 맛볼 수 있게 되었고 5월 13일날 꿈에 그리던 국악예술학교가 개교함으로써 정규학교로 출범하게 되었다.

그후, 국악예술학교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 오늘날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남편은 나와 결혼 후에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면서, 우리나라 민족 예술과 문화를 일본에 알리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남편 덕분에 일본에 우리 전통 문화를 알릴 수 있는 한국무악원을 설치하여 교포 2세와 일본 사라들에게 우리의 전통 예술을 가르쳤다.
남편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한몸에 받던 가서 김정구, 장세정, 이미자, 패티김씨 등 많은 한국 연예인들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나에게는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특히 약속을 어기거나 시간을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편이다. 이는 남편에게서 배운 것인데, 남편은 일에 대해서 무척이나 엄격하고 치밀한 분이어서 누구와 약속을 해서 1분만 늦어도 신용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뒤돌아보지 않을 정도였다.
50년대 민족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개인적으로는 나의 예술활동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 해주면서 해로를 한 남편은 지난 88년 8월에 지병인 당뇨로 고생을 하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30여년을 그분과 함께 살면서 보이지 않게 그분의 도움만 받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나도 곧 그분 곁을 따라가리라.
 

 

영화 선화공주를 찍으면서

요즘 가만히 보면, 영화계에서는 한국 영화보다 외국영화가 더 인기라고 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세칭 헐리우드 영화라고 하는 미국영화를 굉장히 열심히 즐겨 보는 것 같다.
영화. 생각해 보면,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인 ‘선화공주’를 찍으면서 영화계에도 데뷔했었다. 56년도로 기억되는데, 이 선화공주는 해방 전에 내가 동일창극단을 이끌면서 공연활동을 하고 다닐 때 크게 인기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영화 제작자 김영찬씨의 제의에서였다. 김영찬씨는 전주 출신으로 몇 편의 영화를 만들었던 분인데, 선화공주가 연극대본으로 인기가 많았던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로 제작을 하자고 제의를 해 왔던 것이다.
우선 배역진으로는 공주역은 김근자씨가 맡았고 왕자역은 내가 맡았다. 그리고 공주 유모역은 국악인 김녹주가, 임금역은 주선태씨, 옥사장에는 김승호씨가, 쇠돌이역은 희극인 김희갑시, 간신역은 남민씨와 남방훈씨가 맡았다.
당시에는 전문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영화배우라는 직업이 정착되지 못하던 시절이라 연기력이 있는 연극인들이 영화에 많이 참여했다. 특히 김승호씨는 현재 탈렌트로 활약중인 김희라씨의 부친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영화배우이고 주선태씨 또한 인기가 높았던 배우이다.
우리 선화공주 출연진들 중에 창극인으로는 나와 김녹주씨가 출연했는데, 중요한 대목마다 창으로 엮어나가 극적인 재미를 덧붙였다. 지금 말로 하면 일종의 뮤지컬 영화라고나 할까. 선화공주는 백제의 무왕이었던 맛동방이 젊은 시절, 신라의 선화 공주를 흠모하닥 결국 사랑을 쟁취하는 내용이다.
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왕년에 창극단에서 이 ‘선화공주’에서 왕자 역할을 맡아서 크게 성공했었다는 이유 때문에 영화에서도 왕자 역을 맡았다. 영화를 찍으면서 여러 가지 인상 깊었던 추억들도 많이 생각난다.

촬영은 주로 전주 근교에 있는 김제의 금산사와 장성의 백양사 등지의 한적한 산사에서 시작했는데, 한번 촬영에 들어가면 한달 이상이 걸려 한참 청춘기의 남자 배우들에게는 산중에서의 생활이 몹시 괴로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전주 시내에서 촬영을 할 때는 가끔 요정에 가면 예쁜 아가씨들도 많아서 회포를 풀었던 것 같은데, 산중에 들어와 촬영할 때는 스텝진들 뿐이었으니 무슨 낙이 있었으랴.
그래서 배우들 중 청춘 남녀들은 눈이 맞아 연애 사건이 나기도 했는데, 예외없이 나에게도 그런 프로포즈가 들어오곤 했다. 그럴 때는 참으로 거북하고 거절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괴로워서 아예 극중이 아니면, 남자 스텝들을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극중에서 쇠돌이 역을 맡은 김희갑씨만은 여자 스텝들과 아무런 스캔들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참으로 깨끗하고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고 판단했다.
그런 가운데서 자연 김희갑씨와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야 쇠돌아.” “어이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김희갑씨는 나보다 한두살 아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산사 밑에 있는 인가를 찾아 돈을 주고 토종닭을 두어 마리 잡게 하고 촬영이 끝난 후, 아무도 몰래 김희갑씨를 불렀다.
“야, 쇠돌아. 이리와 봐.”
“아니 박동지. 멀쩡한 이름 놓아두고 쇠돌이가 뭐유. 그나저나 극중에서 쇠돌이 역이라서 사람 죽겠는데 말이우. 그런데 무슨 일이우?”
“미안하외다. 이 사람 김동지. 남자가 매일같이 산나물만 먹고 어떻게 살으오. 오늘은 나만 따라오소. 오늘 목구멍 때좀 벗기게 해줄테니.”
“아니 목구멍에 때를 벗기다뇨? 이 산중에 무슨 요리집이라도 있단 말이오”
“이 산중에 무슨 요리집이겠소. 아무튼 나만 따라오면, 오늘 저녁은 실컷 포식할테니까 기대하시게.”
“갑자기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인지 모르겠소. 아무튼 가봅시다.”
그리고는 둘이서 마을로 내려가 사람을 시켜 막걸리 한 되 받아 오라고 해서 닭고기와 함께 먹었다. 그때 먹었던 닭고기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정말 평생 고기 한번 먹어 보지 못한 사람마냥 맛있게 먹었다.
“아이고, 내 살다 살다 이렇게 맛난 음식은 처음 먹어 보오. 이거 우리 맛동 왕자님 덕분에 오늘 포식했소이다. 거기다가 막걸리까지 한잔하니 이거 정말 임금님 수랏상이 아니 부럽소이다. 박동지 우리 이렇게 가끔 나와서 먹읍시다.”
그후 가끔 이렇게 김희갑씨와 함께 촬영이 끝나면 몰래 빠져나와 닭고기를 먹으러 다녔는데, 지금도 가끔 김희갑씨를 마나면, ‘선화공주’ 촬영하던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김동지” “박동지” 하면서 반가워한다.
지금은 원로 연예인으로 대접받고 있는 김희갑씨는 그대 당시에 ‘선화공주’로 영화계에 데뷔를 했는데, 최근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영화 시나리오 700여편을 영화진흥공사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그중에 ‘선화공주’ 대본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으로 반가운 생각이 앞서면서 옛생각이 절로 났다.
2개월여에 걸쳐 제작된 ‘선화공주’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술이 부족해서였는지 총천연색 필름을 현상할 곳이 없어서 필름 모두를 미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겨우 필름이 현사되어 비로소 상영할 수 있었다.

‘선화공주’는 지금의 국도극장인 을지로 황금좌에서 57년 8월 15일부터 상영되었다. 원래는 보름 예정으로 상영을 시작했는데, 개봉하자마자 밀려오는 관객들로 인해 보름을 더 연장하였고 ‘선화공주’는 연일 만원사례였다.
‘선화공주’의 흥행 성공은 영화제작자인 김영찬씨를 일약 돈방석에 앉게 했는데, 나중에 김영찬씨는 ‘선화공주’ 한 편으로 돈을 벌어 지금의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5층짜리 빌딩을 사기도 했었지만, 나중에 ‘격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가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때 산 빌딩을 팔았다고 한다. 당시 나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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