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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8. 해방, 그리고 전쟁2022-10-01 16:22
작성자 Level 10

8. 해방, 그리고 전쟁

 

인기 누리던 여성 국극단


요즘들어 해방 직후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성국극단이 다시 조직되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며칠 전에는 ‘고려여성국극단’이라는 단체에서 ‘고구려의 혼’이라는 국극을 한다는 연락을 받았고, 또 그전에는 여성 국극단에서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라는 국극을 올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성국극(女性國劇).
참으로 여성 국극은 나에게 많은 추억과 기억을 추스르게 하는 것이다.
이땅에 최초의 여성국극단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한다면 설왕설래를 하실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분명히 내 기억으로는 여성국극단의 최초의 단체는 1945년 3월에 나 박귀희와 박녹주(朴綠珠), 김소희(金素姬), 박소군(朴素君), 조유색(趙柳色), 조소옥, 조농옥, 성추월(成秋月)씨와 함께 만든 ‘여성국악동호회(女性 國樂 同好會)’라고 말할 수 있다.
이중 박녹주씨는 지난 1981년 타계하기 전까지 나와는 돈독한 교분을 유지했는데, 나에게 있어서는 스승님이자 선배로서, 또 같은 경상도 출신이라는 점에서 깊은 정을 유지하면서 활동을 하신 분이다.
김소희씨는 극단 활동을 할 때부터 나의 마누라역으로 많이 나왔고, 지금도 형님 아우하면서 친형제처럼 지내는 사이이다.
박녹주씨는 앞에서도 잠깐 밝힌 바가 있지만, 경북 선산 출신으로 나처럼 경상도 출신으로드물게 판소리를 배워 이름을 떨친 명인이다.
박녹주씨는 당시에 명창이었던 김정문 선생에게 흥보가를 배웠고, 가선(歌仙)이라고 일컫던 박기홍(朴基洪) 선생으로부터 춘향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이어서 명창 송만갑(宋萬甲), 정정렬(丁貞烈)로부터 판소리의 맥을 전수받았던 분이다. 또한 박녹주씨는 오랫동안 나와 창극활동을 계속 해왔던 사이이고,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후에 내가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할 때 창설 멤버로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 국악 예술 발전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분이다.
아무튼 여성국악 동호회의 설립은 박녹주씨를 중심으로 해서 내로라하는 여류명창들이 몰려 들었다.
애초에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내가 해방전 동일 창극단에서 창극활동을 하던 시기에는 남녀 단원들이 전국을 돌면서 공연 활동을 하였던 관계로 애로사항이 참으로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젊은 단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녀간에 연애문제도 많이 생겨났고, 그러다가 눈이 맞아 결혼을 한 연인들은 결혼을 해서도 극단을 따라다니다 보니 자연 애도 낳게 되었고, 따라서 우리가 머물던 여관방에는 항상 애기 기저귀가 널려 있었다.
이리해서 순회 공연을 다닐 때면 애기가 있다고 여관에서는 방을 빌려주는 것을 무척 싫어했고, 여러 가지 문제도 많았다.
그래서 당시 나는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창극단을 만들면, 좀 깨끗하고 홀가분한 공연활동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던 와중에 19살 되던 해 가을이었던가 레코드 취업관계로 일본에 나갔다가, 나는 우연히 동경에 있는 일본의 여성단체인 송죽가극단(松竹歌劇團)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아사쿠사(浅草) 국제 극장에서 열렸던 이 공연은 순수한 여성들로만 구성된 단체라는 점에서 그때 당시에 나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들이 남자역을 하는데, 참으로 연기력도 좋았고, 호흡도 잘 맞으며 재미도 있었다.
‘다까라스’로 불리는 일본의 여성극은 지금의 일본의 귀중한 전통문화로 보존되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이 일본의 여성극인 ‘다까라스’는 지금도 일본의 전통극으로 정부의 지원과 보조 아래 훌륭하게 보전되고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고 한다.
국악인의 한사람으로서 일본의 이러한 정책을 부러워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지만, 그래도 역시 부러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무튼 이때부터 나는 우리나라에 여성 국악 단체를 만들 것을 꿈꾸어 왔다. 그러던 것이 1945년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선배인 박녹주씨와, 여러 여류명창들과 의기투합해 ‘여성국악동호회’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여성국악동호회의 상무(常務)를 맡았고, 초대 이사장으로는 박녹주씨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첫 번째 공연작품으로 춘향전을 내용으로 하는 ‘옥중화(獄中花)’를 내놓았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여성국극이라는 것이 인식이 별로 되지 못했던 탓인지 흥행에는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리는 8. 15 해방을 맞게 되었고, 일년여를 더 준비한 우리들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두 번째 창작 창극인 ‘햇님 달님’이란 작품을 내놓았다.
이 ‘햇님 달님’은 작가 김아부(金亞夫)씨가 쓴 작품으로 김아부씨는 일제 대부터 많은 창극 대본을 써서 상당한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던 분이었다.
이 공연에서 나는 햇님 역할을 맡았고, 달님 역할은 김소희씨가 맡았다. 그리고 기획과 연출, 의상장치 등은 당시 인기 가수였던 신카나리아의 부군이었던 임서방씨가 맡아서 진행해주었다.
‘햇님 달님’은 서울 시공관에서 초연을 했는데, 뜻밖에 대단한 인기를 모으게 되었다.
서울 공연이 끝나자 우리는 대구 키네마 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역시 대던한 성황이었다. 그때 당시 대구 키네마 극장은 개관한지가 4년쯤 된 새 건물이었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 들었는지 극장 문짝이 떨어져 나가고 유리창이 깨질 정도로 극성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극장에 들어오려고 난리를 쳤고 공연이 끝나자, 5~6백여명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몰려와 싸인을 해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뒷문으로 도망을 치기도 했다.

 

 

햇님 달님의 인기


어디든지 극성팬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둘러본 결과, 아무래도 경상도 쪽 사람들이 조금 유별난 것 같다.
원래 그 쪽 사람들이 좀 호탕하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공연을 감상하고 난 뒤의 반응도 아주 적극적이다. 감동을 해서 울기도 하고 너무 좋아서 박수를 치고 웃기도 하고, 언니하자는 사람, 동생 삼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적극ㄱ적으로 구혼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아무튼 우리 일행들은 대구 키네마 극장에서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극성팬들의 싸인 요구를 피해 다음 공연 예정지인 부산으로 향했다.
공연 장소는 부산 역 앞에 있는 공회당이었다.
그런데 부산 역시 ‘햇님 달님’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아수라장이었다. 공연 입장권을 사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두줄로 늘어서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식사를 하면서 표를 사가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밀리자 경찰은 이들의 질서를 잡기 위해서 기마대까지 출동시킬 정도였고, 입장권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그때 공연 관람을 온 사람 중에는 만삭의 임산부가 있었는데, 공연 구경을 왔다가 콩나물 시루처럼 꽉 찬 사람들 때문에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산기가 왔던 것이다. 결국 그 임산부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공연장에서 애기를 낳게 되었다.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 임산부에게 미역값이라고 하라고 당시 돈으로 만원을 기증하기도 했다.
해방되고 6.25가 있기 전 이야기니까, 그때 공회당 공연장에서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세상을 본, 그 아기는 이제 40대 중년이 되어 있으리라.
그후, 우리 ‘여성국악동호회’가 가는 곳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덕분에 우리는 항상 만원사례를 해야 했다.
그렇게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와 경기도로 옮겨 다니면서 전국 공연을 하였다. 우리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고 있을 때, 우리는 민족의 비극인 6.25를 맞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당시 ‘햇님 달님’의 백제 왕자인 남자 주인공 역은 내가 맡았고, 상대 여성 주인공 역은 명창인 김소희씨가 맡았다.
그때 당시에 신문 매스컴에서도 우리 ‘여성국악동호회’의 공연을 알렸고, 이때 닦은 연기력은 훗날 ‘선화공주’와 ‘춘향전’등을 총천연색영화로 촬영할 때 주연으로 출연해 연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6.25를 겪으면서


민족의 비극 6.25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성국극이 한창 인기를 누리던 시절, 나는 단원들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항상 만원사례를 해야 했다.
그러던 무렵 6.25가 터졌다.
전쟁 초기에는 며칠간 별스런 생각없이 계속 공연 준비를 했는데, 점점 상황이 심각해진다는 방송에 단원들은 가족과 고향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광주로 피난을 갔고, 나와 친형제처럼 지내던 김소희 형님은 충청도로 피난을 갔다. 우리 단원들은 전쟁으로 인한 두려움과 슬픔으로 모두 안절부절했다.
가는 곳마다 배고픔과 공포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러다가 다시는 예술활동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9.28 수복 후 나는 서울에서 단원들을 몇몇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심정은 정말 어찌나 반갑고 기뻤던지 서로 부둥켜 안고 팔짝팔짝 뛰며 엉엉 울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우리는 1.4후퇴를 겪어야 했고 나는 대구 친정에 내려가 한 3개월 가량 있으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무렵 부산에 내려가 있던 김소희 형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귀희 동상. 사변이 났다고 집에만 그렇게 박혀 있을거여? 예술인은 절대로 쉬면 안되는 벱여. 여기 부산에 와서 피난민들을 상대로 공연을 멋지게 한번 히보자고.”
나는 곧바로 부산으로 달려 갔고, 다시 공연 활동을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뜻대로 이루어주질 않았다.
간신히 무대를 얻어 공연을 올렸지만, 흥해은 커녕 그날 그날 간신히 끼니를 이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고 모든 국악인들이 모두 겪어야 했던 일이었고, 더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한 일년쯤 지났을까, 나는 다시 여성국악동호회 팀들을 모아서 박후성(朴厚性)씨 등과 함께 ‘여성국악동지사’를 만들었다. 또 같이 일하던 박녹주 선배는 ‘국극사’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난날처럼 흥행이 순조롭지 않았고, 물질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우리 뿐만 아니고, 사변 전 여성국악동호회의 인기에 힘입어 창단되었던 많은 여성 창극 단체들이 서서히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당시 여성 창극단체는 전국에 열 다섯 개 정도가 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들은 사변후 3~4년 정도 명맥을 잇다가 사라져 버렸고, 몇몇 팀들은 간신히 버티다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6.25는 많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물론 6.25 전 이야기지만, 몇몇 훌륭한 국악인들이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월북하였다.
한때 창극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조상선, 정남희, 공기남, 임소향, 그리고 나의 스승님인 박동실 선생 등이 대표적인 월북 국악인이다.
박동실 선생은 해방이 되고 좌우 이념 대립이 한창이던 시절, 무슨 이유에서 인지 홀연히 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변이 터지자, 북에서 인민군들과 함께 내려와 서울의 나의 집과 김소희씨 댁을 방문했다고 한다. 무슨 저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집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아마 자신이 아끼던 제자들을 데리고 북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추청된다. 만약 그때 내가 피난을 가지 않고 집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나는 북에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승님 말씀이 하늘 같았던 시절, 더군다나 이념과 사상이 뭔지 잘 몰랐던 우리 예술인들은 스승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게 당연한 일로 알았기 때문이다.
6.25는 많은 상처를 안겨 주었지만, 나에게 또다른 전환기를 맞게 했다. 궁핍한 생활은 예술활동의 위축을 가져오게 하였고, 또 외국문물의 무분별한 유입은 우리의 전통음악이나 창극이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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