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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3. 내가 택한 길2022-10-01 16:20
작성자 Level 10

3. 내가 택한 길


춥고 배고픈 소리의 길로


어떤 외국 시인의 이런 내용의 시가 기억이 난다.
사람에게는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이 있단다. 그런데 한번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오기란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이다. 고로 사람이 태어나 어떤 길을 걸을 때는 그것이 운명이 되었든 선택이 되었든 간에 부단히 노력하며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택한 길이 잘못되었더라면, 그 잘못을 빨리 깨닫고 다른 길을 택해야 하고, 험한 길이라도 가야 할 길이라면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견디며 나가야 한다.
대구 오포동 국악 사설 전수소 담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가락에 빠져 단가를 익힌 지 수 개월, 국악과 소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린 나이에 어쩌자고 이런 길을 택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소리가락에 빠져서 무작정 배우고 싶었고 부르고 싶었다.
전수소에서 나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은 박지홍(朴枝洪)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국악의 길로 인도 하신 분은 손광재 선생님이시지만, 첫 스승님은 박지홍 선생님이 되는 셈이다.
박지홍 선생은 당시에 꽤나 이름이 있는 명창이었다. 박지홍 선생은 전라도 나주 출생으로 명창 박기홍과는 종형제 간으로 명창 김창환에게서 소리 공부를 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박지홍선생은 향리를 떠나 대구에 정착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박지홍 선생이 한창 소리공부를 하던 시절, 이방의 외동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여자와 함께 도주하여 대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당시 대구에는 그의 종형인 박기홍이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의 수행고수를 하다가 나중에 본격적인 소리공부를 해서 명창이 되었다. 그런데 박지홍 선생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1920년 이후 대구를 떠나지 않고 후학들만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나의 소리 공부는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따라서 집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알게 되면 큰일난다는 생각에 날마다 가슴 조이면서 어렵게 어렵게 소리를 익혀갔다.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우리 국악은 신분이 천한 사람이나 광대가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때인지라, 국악을 하게 되면 ‘버린 자식’처럼 취급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철부지 나로서는 알 리가 만무했지만, 그래도 집에는 한마디 이야기도 하지 않고서 소리공부를 해 나갔다. 그러면서 차츰 목청이 트여갔고, 소리 공부에 사로잡혀 갈 때 쯤, 나는 학교 공부보다 소리에 매달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소리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 스스로가 재질이 있다고 인정하고 대명창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결심을 했다니 실소가 터진다.
아무튼 그 때부터 시작한 국악은 보통학교를 다녀야했기 때문에 정규 코스를 밟을 수는 없었지만, 손광재 선생님의 배려로 인해 박지홍 선생님 밑에서 소리 공부를 충실히 해 나갈 수 있었다.
손광재 선생은 소리를 잘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소리의 안목이 높았던 분으로 생각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분은 귀명창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나 사람에게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는 법. 이렇게 소리에 홀딱 빠져서 소리 공부에 미쳐 있을 무렵, 나의 이 비밀스런 공부는 집에 알려졌다. 자연히 온 집안은 발칵 뒤집히고, 어머님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아니 이것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니 뭣꼬? 소리? 소리공부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카이.”
하긴 공부를 잘 하여 출세하기를 바라던 딸 자식이 느닷없이 소리에 빠져 흥얼거리고 다니니 얼마나 복장이 터졌겠는가. 어머님은 결사 반대였고, 고집 센 나는 죽기살기로 소리 공부를 하겠다고 우겨댔다.
그러나 가족들이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나의 외숙모님이 국악을 좋아해서,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 주시고 후원해주셨다. 물론 당시만 해도 외숙모님은 나의 소리 공부를 취미 생활 정도로 가볍게 여기셨던 모양이다.
어머니께서도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자, ‘저러다가 말겠지’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나의 국악 인생은 지금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댕기머리 소녀의 첫공연

어떤 예술이건, 아마츄어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는 등단의 과정을 받게 되어 있다. 흔히 이런 과정을 ‘데뷔’라고 말하지만, 사람마다 이 데뷔하는 과정도 약간씩 다르고, 기회도 다를 것이다.
나는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국악인으로서 정식으로 데뷔를 하게 되엇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린 나이인데도 겁도 없이 무대에 데뷔한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그건 우연한 기회로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나는 박지홍 선생님 밑에서 소리 공부를 하면서 열 네 살 되던 해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35년 3월이었다. 같이 학교를 졸업한 동급생들 가운데는 졸업과 함게 시집을 가는 그런 친구들도 있었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철부지 시절이었지만, 나는 나의 진로에 대해서 막연하게나마 생각해야 할 시기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박지홍 선생 밑에서 소리 공부를 계속해오고 잇던 터였고, 이듬해에 서울에서 열리는 전국 명창대회에 참가해 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상급학교를 갈 것인지, 아니면 학교 진학을 그만두고 국악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인지에 대해서 망설이고 있던 차였다.
보통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런 고민에 빠져있던 와중에 평생동안 국악의 길을 걷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당시 명창으로 이름 높은 이화중선(李花中仙)씨와의 만남이었다. 이화중선씨는 당시 대동가극단(大同歌劇團)을 이끄는 단장이었는데, 대구에 내려와 사흘간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화중선씨가 대구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은 손광재 선생은 나를 이화중선씨에게 소개했다.
“애가 바로 내가 가르치던 학생인데 참 소리를 잘한다오. 성은 박씨고 이름은 귀희라고 하는데 소리한번 들어보실라요.”
요즘말로 치면 테스트였다. 이때 이름을 박귀희라고 한 것은, 혹 부모님께 알려질까봐서였다.
“귀희라고? 아따 그것 이쁘게 생겼네. 그래 니 소리한번 들어보자.”
나는 당대의 대명창 이화중선 앞에서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그 동안 배운 단가를 불렀다. 이윽고 소리를 다 들은 이화중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이고, 손선생님. 그동안 대구에서 명창 하나 기르고 계셧네요잉. 야를 나 줏쇼. 이름이 귀희라고 힛제. 너 나 따라가서 우리 극단에 입단할래?”
“네? 극단에 입단을 하라고예? 아니 선생님, 그 말씀 사실입니꺼?”
“그래, 좀 고생은 되것지만, 나를 따라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공연도 하면 기량도 늘고 너한테는 좋을 것이여.”
나는 이렇게 해서 대동가극단에 입단을 하게 되었다.
대동가극단은 이화중선의 남편인 임종원(林宗元)씨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멀리 만주지방까지 가서 나라를 잃고 설움 속에 사는 우리 서민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공연을 했었다.
따라서 대동가극단은 내로라하는 당대 명창들이 몇 분 계셨는데,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쑥대머리’로 너무나 유명한 명창 임방울(林芳蔚), 장판개(張判介), 박초선, 신영채 등이 참여해서 판소리와, 창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의 프로그램으로 전국을 순회공연하면서 한참 인기를 누리던 가극단이었다.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지 며칠 후, 나는 대구극장에서 첫무대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나의 데뷔 무대라고 할 수 있겠다.
댕기머리를 하고 노랑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랐던 나는 극장을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눈앞이 캄캄해 오고 가슴이 떨려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심호흡을 크게 하고, 그동안 배운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 때 부른 소리는 단가 ‘소상팔경가’라고 불리는 ‘산악이 잠형하고’ 였다.

 

산악이 잠형하고 음풍이 노호헌데
수면에 우는 소리 천병만마 서로 맞어
철기도창이었난듯
처마 끝에 급한 형세는 백척폭포 솟아 있고
대수풀 흩뿌릴제, 황영의 깊은 한을
입입히 호소하니, 소상야우라 하는데요~~

 

이 소상팔경가는 중국의 소상팔경을 노래한 것으로 경(景)을 한단위로 해서 8경까지 이어지는 단가이다.
소리가 끝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받아 보는 박수소리에 얼떨떨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노래를 하는 동안 어찌나 긴장했는지 길게 늘어뜨린 댕기머리를 그때까지 꽉 쥐고 있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우스꽝스런 꼴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입을 모았다.
“아니 어쩜 저렇게 어린 것이 소리를 그리 잘할꼬? 대구에서 소녀 명창 났다카이. 누구 딸내미인지 참말로 잘한데이.”
손광재 선생님에게 어개 너머로 혼자 배운 단가. 부모님 눈을 피해가면서 학교를 오가는 길에 담벼락에 붙어 전수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익힌 단가. 나는 이 단가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으면서 화려하게 무대에 데뷔했고, 그 다음 날 대구 장안에서는 대구에서 ‘소녀 명창’이 났다고 화제가 되었다.
대구극장은 그 다음날부터 나를 보려고 오는 구경꾼들로 극장은 초만원 사례를 겪었고, 마침내는 대동가극단에서 귀염받는 소리꾼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화중선을 따라 대동가극단에 입단한지 며칠만에 첫 공연으로 명창이 났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고, 이 가극단의 일원이 되어 일급 단원의 대우를 받으며 전국 순회공연 길을 오르게 되었다.
나의 국악 인생은 이때부터 긴 여정이 시작되었고, 파란만장한 소리꾼의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여행이기도 했던 것이다.


 

여류명창들이 많았던 시절

재미없는 이야기 같지만, 당시 국악계에서 활동하던 여류명창 이야기 좀 하고 넘어 가야겠다.
흔히 판소리는 전라도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독특한 음악 장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판소리는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생되었고, 유명한 명창들이 전라도 쪽에서 많이 나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판소리 열두마당을 집대성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선생에 의해 판소리의 음악적 기초가 정리되면서 자연 전라도를 중심으로 유명한 명창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고, 판소리의 사설들도 거의가 전라도 사투리로 되어 있어, 타지방 사람들이 판소리를 배우려면 그만큼 힘이 든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내가 한참 소릿꾼으로 명성을 얻고 다닐 때, 나의 고향이 대구라고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 판소리를 어떻게 배웠냐는 질문을 곧잘 하곤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음악적인 장르로서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협소함이 바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공부를 할 때 부딪치는 약간의 어려움이지 고향이 경상도이기 때문에 판소리를 배울 수 없다는 이야기는 억측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 단적인 증거로 내가 국악계에 발을 디딜 무렵만 해도, 경상도 출신의 여류명창들이 크게 활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이야기한 대동가극단 단장인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은 남원에서 오랫동안 살기는 했지만 원래 고향은 부산 동래 출신이고,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해방 후 여성국악 동호회를 만들 때 동고동락을 같이 한 명창 박녹주(朴綠珠)는 경북 선산이 고향이다.
그리고 1930년 발족된 조선 음률협회(朝鮮 音律協會)에서 활동하던 김초향(金楚香)은 대구, 김녹주(金綠珠)는 김해, 김향란은 포항, 신금홍(申錦紅)은 거창, 오비취씨는 진주, 신숙은 함양이 고향이었다. 이들은 당시 한가닥씩 한다는 쟁쟁한 여류명창들이었고, 이외에 남자 명창들은 거의가 고향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하긴 문헌에 보면, 판소리의 기원은 신라의 ‘화랑’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설이 있다. 특히 화랑도들이 놀았던 ‘산대잡희’의 한 과정은 판소리적 요소가 다분한 노래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신라의 땅이었던 영남지방에서 여류명창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추측컨대 개화기 이후에 여류명창들의 출현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던 이유는 사회가 봉건적인 시대에서 개화 시대로 바뀌면서, 종래 권번에서 기녀들에 의해 내려온 판소리가 일반인들에게 보급되면서이지 않나 싶다.
여류명창의 계보는 보통 조선조 말엽에 신재효 선생에 의해 발굴된 진채선(陳彩仙)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그 당시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들은 모두 남자였기 때문에 여성들은 감히 진출할 수 없는 영역으로 알았는데, 진채선은 남장(男裝)을 하고서 소리를 했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진채선은 1869년 7월, 경복궁의 경희루 낙성연에 참가하여 대원군 앞에서 소리를 했는데, 이른바 어전연창(御前演唱)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명창의 반석 위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로 가야금병창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소향(李素香), 창의 허금파(許錦波), 대구출신의 강소춘(姜小春). 홍도(紅桃), 보구(寶具) 등 많은 여류명창들이 활약했다.
아무튼 여류명창들의 출현으로 우리 국악계는 많은 활력을 얻을 수 있었고, 그중에서 경상도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은 판소리의 지역성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내가 속해 있었던 대동가극단 단장인 이화중선의 경우 당대 최고의 여류명창으로 각광을 바았는데, 키가 자그마하고 아주 아담하게 생긴 분이었지만, 무대에 나서서 소리를 하면 성음이 어찌나 뛰어난지 목이 샘물 솟듯 나오곤 하였다.
특히 목이 맑고 아름다워서 말 그대로 옥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소리를 냈는데, 아무리 어렵게 튀는 목도 얼굴짓 한번 않고서 태연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목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하기 전이나 아침에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은 목을 틔게 하려고 악을 쓰면서 연습을 하지만, 이화중선은 그런 연습 한번도 없이 자연스럽게 목을 내는 사람이었으니 그의 성음이 얼마나 천부적이었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천재 여류명창 이화중선


여류명창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당대를 풍미했던 여류명창 이화중선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넘어가자.
이화중선은, 다른 사람에 비해 늦게 소리를 시작한 사람이다. 문헌에 의하면 1898년 생으로 부산 동래 출신으로 전해져 오는데, 명창 송만갑(宋萬甲), 이동백(李東伯) 선생에게 사사를 받은, 성음이 매우 뛰어난 여류명창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전라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15살 되던 해 전북 남원의 박시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곳을 찾은 협률사(協律社) 일행이 공연한 창극춘향전을 보고 싶어 심취한 나머지, 소리공부를 하고 싶어서 집을 뛰쳐나와 결국 명창이 된 사람이었다.
국악을 하는 사람이나, 예술은 하는 사람들이 대개가 그렇지만, 이렇게 가슴 속에서 끓어 오르는 ‘끼’가 있어야 목적한 바를 이루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이화중선은 1923년에 있은 조선물산 장려회에서 개최한 전국 판소리 대회에서 ‘추월만정’을 불러 당시 판소리의 여왕이라고 하는 배설향(裵雪香)을 앞지르고 장원을 차지하면서 국악계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 때 심사를 맡은 가왕(哥王) 박기홍(朴基洪)은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감격한 나머지 “배설향이가 소리계의 여왕이라면, 자네는 정말 여자 중의 선녀일세”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영 출신의 박기홍 선생은 즉석에서 화중선(花中仙) 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당시 이화중선의 본명은 이봉학(李鳳鶴)으로 전해진다.
지금도 판소리계에서는 이화중선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처럼 떠도는데, 우리 민요 속에서도


 십오야 밝은 달은 구름 속에 놀고요


 명기명창 화중선이는 장고 바람 속에 논다


라는 구절이 있을 만큼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아무튼 내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하여 전국을 순회하고 다닐 때 공연을 할 때마다 이화중선의 인기는 가히 열광적이었다. 재창, 삼창은 기본이요, 사창 오창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불행히도 이화중선씨는 자식이 없었다. 그 대신 그의 동생들도 소리에 탁월한 재주가 있어 국악계에 입문했는데, 한창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요절한 이중선(李中仙)은 그의 여동생이고, 북을 잘쳤던 남동생 이화봉(李化鳳)이 있었다.
이화중선은 훗날 일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을 위해 공연 갔다가 큐우슈우(九州)에서 배가 침몰하여 허망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명창 김소희씨가 전하는 말로는 그가 일본 공연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가깝게 지내던 대구 출신의 김초향 명창이 이를 만류했다고 한다. 김초향씨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손가락을 짚어 사주를 좀 볼 줄 알았던 모양이다.
“언니, 이번 공연은 안가시면 좋겠는데, 이번에 가면 영 못오실 것 같은데 가실라요?”
“무슨 소리, 조선땅에서 노래를 부르나 일본에서 부르나 내 동포 위해서 노래 부는 것은 마찬가진디 내가 못갈 디가 어딨어? 그리고 내가 왜 못오니, 나 다시 온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화중선씨는 일본으로 떠났는데, 김초향씨 말대로 못오고 말았다.
나와는 형님 동생 사이로 고락을 같이 하고 있는 만정 김소희(金素姬)씨도 열 세 살 때 이화중선의 ‘추월만정’을 듣고 국악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훗날 이화중선씨에게 소리공부도 하고 공연도 같이 하면서 생활한 경력이 있다.
이화중선이 일본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해는 바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43년도 음력 정월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 후에 내가 마침 일본 공연이 있어서 큐우슈우 근처를 지나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저 자리가 그 유명한 명창 이화중선씨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물에 빠져 세상을 뜬 곳이지요.”
나는 멀찌감치서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여류명창 이화중선씨가 이역만리 타국에서 변을 당했던 곳. 그곳을 지나는 나의 기분은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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