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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5. 명창의 꿈을 좇아2022-10-01 16:21
작성자 Level 10

5. 명창의 꿈을 좇아

 

실패한 결혼


사람들은 살면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는다. 그 중에서는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두고 싶은 일도 있고,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나에게 그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결혼이다.

꿈도 많고 희망도 많았던 열 일곱 살. 흔히 요즘은 사춘기가 빨리 시작된다고 한다고 하지만 통상적으로 이팔에 십육, 이팔청춘이라고 하지 않던가. 소리 공부를 하면서 소리에 빠져, 관객의 박수 소리와 환호를 받으면서 공연을 다니던 창극단 시절, 나에게도 사춘기라는 것이 찾아 왔던 모양이다.
그 당시 창극단은 전국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다녔기 때문에 합숙을 하는 관계로 부득불 남녀가 함께 한가촉처럼 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단원들 사이에서는 연애 사건이 종종 일어 났다. 그 중에는 눈이 맞아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공연을 다니면서도 부부생활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들은 사랑의 실연으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날아가는 참새만 보아도 웃고 솥뚜껑이 뒤집어진 것만 봐도 깔깔거리고 웃는다는 열 일곱 처녀 시절.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단원들은 공연이 끝난 밤이면 여관방에 모여 낮은 목소리로 연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어머 그래서 어떻게 됐어. 심순애가 돈에 눈이 어두워 이수일을 발로 걷어 찼다 이거지? 어머, 심순애 그 여자 아주 못됐다.”
“무슨 소리꼬, 그게 아니라 김중배의 야욕에 심순애가 사기 당한거라예.”
당시 장안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장한몽 이야기로 밤을 새우면서 신세대를 자처하는 극단 처녀들의 마음은 백마를 탄 기사들을 꿈꾸고 있었다. 하긴 그 때 당시에는 열 일곱 살이면, 이미 결혼을 해서 애가 한두씩 없는 사람이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는 어느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평안도 사람으로 성은 강(姜)씨였다. 우리 공연을 보러 왔다가 우연히 알게 된 나를, 그 분은 대동가극단 시절부터 줄곧 나를 좇아다니면서 구혼을 했다.
“귀희씨,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첫무대에 서면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공연 생활을 해오면서 자연히 팬도 생기게 됐고, 그중 극성팬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에게 프로포즈를 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혼보다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이루고야 만다는 오기 때문에 명창이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결혼은 생각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집에 있는 날보다도 타향살이 하는 날이 더 많았던 공연생활. 외로움과 함께 찾아오는 공연 활동의 고충은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한 때였다. 그리고 얼마 안돼서 나는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 생활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탄치 못했다.
국악인 박귀희와 그저 여느 남자와 다를 바 없는 보수적이고 평범한 그 사람과의 갈등은 나의 예술 활동을 갈등으로 몰아 넣었다.

는 당연히 계속 무대에 오르려고 했고, 그 사람은 나를 집에 들어 앉혀놓고 평범한 주부가 되어 애도 낳고, 바느질도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는 사람이 되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집을 떠나면 몇 달씩 떨어져 살아야 하는 나의 공연 생활은 결국 우리 사이를 점점 멀어지게 했다. 자연 다툼도 잦았다. 나의 공연 활동을 이해해 주지 않는 그 사람이 야속하기만 했다.
“이제 예술 활동은 그만두고 집에서 집안 살림이나 하시오.”
남편은 나에게 평범한 주부가 되기를 원했다.
예술가가가 자신의 예술 생활을 이해해주지 않는 배우자를 만났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을 뺏으려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 그 사람이 밉고 야속하기만 했다.
아기도 생겼다.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따라서 애들은 어머니가 계속 맡아서 길러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사람은 나를 떠나가고 말았다. 합의에 의해 헤어진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 사람은 나중에 6.25 후 심장마비로 작고하였는데,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가보니 이미 딴 사람과 재혼을 해서 두 남매를 두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첫 인연이었는데, 그 인연이 오래 가지 못하고 불행하게 되어 나의 인생사에 있어서 펼쳐보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로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점철되는 어두운 부분으로 기억의 저편에 있다.

 

거액 받고 첫 레코드 취입


연전에 어떤 국악인이 우스개 소리로 ‘우리나라 민요 보급의 일익은 담당한 사람은 대중가수인 조용필과 김세레나의 공이 크다.’ 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이유는 조용필씨는 ‘한오백년’으로, 김세레나는 ‘새타령’으로 유명해졌으니 그나마 우리 민요가 그렇게 레코드를 통해서 보급된게 아니냐는 자조적이고 독설 섞인 말이었다.
사실 우리 국악인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성할 바가 많지만, 일반 가수들이 양음악에 맞춰 불러대는 민요소리는 정말 죽을 맛이다.
하긴 들리는 말로는 가수 조용필씨는 소리 공부도 좀 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우리 음색에 맞춰 부르는 민요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좀 씁쓸하다.
대중가수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런 생각이 나는데 요즘 가수들은 정말 도깨비같다. 텔레비전을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가요 톱텐인가 뭔가하는 프로를 보면, 별로 듣도 보도 못한 가수들이 일등을 하더니, 몇 주 지나면 요란하게 옷을 입은 젊은 친구가 일등했다고 울어댄다.
하긴 요즘은 레코드 판 하나 잘 내면, 억대 부자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하지 않는가.
요즘이야 세상이 하도 좋아져서 돈만 있으면 레코드도 막 취입하고, 노래가 괜찮아 인기가 있으면, 더불어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한다.
예전에는 정말 제대로 노래를 잘한다고 인정을 받아야만, 레코드에 취입할 수 있을 정도로 레코드 취입 조건이 까다로왔다. 그러니 일단 레코드를 취입만 하면, 요즘 말로 치면 스타 대열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한양창극단에서 활동하던 열 여덟 살에 레코드를 취입했다. 레코드사는 일본의 빅타레코드사였는데, 일본식 발음으로는 ‘비꾸다레코드사’로 기억된다. 내가 취입한 음반은 춘향가와 흥보가였다.
그 때는 나는 레코드사에서 취입료로 1천1백원을 받았다. 말이 그렇지 그 때 돈 1천1백원이면 무척이나 큰 돈이었다. 쌀한가마니에 4~5원 하던 시절로 기억 되니까 요즘 돈으로 치면 몇 천만원은 될 것이다. 그 돈으로 나는 서울 혜화동에다가 자그마한 집을 사서, 대구에 계시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왔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세를 지고, 내가 국악인이 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신 외숙모님게 집을 한 채 마련해 드렸다.
어머니는 내가 서울에 집을 마련할 때까지 줄곧 대구에 와 계셨었다. 집안 사정으로 아버지와 헤어져 함께 대구 외가집에 지내면서 내가 몰래 소리 공부를 하러 다니는 것을 알고 펄펄 뛰시면서 반대하던 어머니. 그러나 내가 이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자 어머니께서는 매일같이 절에 나가셔서 나를 위해 불공을 드렸다.
나는 어머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편안하게 모시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한참 창극으로 인기를 누리던 시절, 다달이 모은 돈을 꼬박 꼬박 모아서 어머니께 송금해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송금해 드린 돈으로 나중에 조그만 과수원도 하나 샀고, 또 우리 모녀가 기거할 집도 한 채 마련했다. 레코드를 취입해 처음으로 만진 거금. 이 돈으로 집을 마련해 어머니를 모실 수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살 되던 해, 지금의 예음홀 자리인 동양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었는데, 당시 오케이레코드사 한국 지점장인 이기세씨가 공연을 보고 찾아와서 레코드를 취입하자고 해서 그해 3월에 일본까지 가서 레코드를 취입했다.
그 때 취입한 노래는 단가 ‘천하가 태평하면’과 심청가 중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이었다.
오케이 레코드사는 그로부터 삼년 후에 우리나라에 녹음시설을 다동에 마련했는데, 후에 녹음할 때 고인이 된 임유앵 선배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취입한 기억이 난다.


 

명창...명창, 명창의 길


요즘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여러 가지 불만이 많다.
첫째 요즘 학생들은 옛날에 비해 너무나 고생을 모르고 큰 탓인지는 몰라도 끈기가 없다. 쉽게 지치고 쉽게 포기하고, 그리고 어디다가목표를 두고서 국악을 하는지조차도 모르고서 공부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또 잘 알다시피 국악이 여타의 다른 장르에 비해 소외도고 발전되지 못한 관계로 국악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의 불만과 더불어 슬프게 하는 것은 귀에 쏙 들어 올 정도로 타고난 학생들이 적다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서 가야금병창을 받는 사사받는 학생들은 70여명이 넘지만, 그중에서 ‘이놈이 쓸만하다’라고 꼽을 수 있는 학생들은 몇몇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력이 모자란 점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다는 사실이 못내 못마땅하다.
그 옛날 나는 어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리를 배우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리고 명창이 되어야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얼마나 다짐했던가.
유성준 선생 밑에서 공부할 때는 단가 하나를 가르쳐 주면, 하루종일 밖에 나가 북채로 바위를 두드리며 연습을 했다. 저녁에는 선생님 앞에서 하루종일 연습한 소리를 다시 해야 했는데, 만약에 틀리거나 선생님 맘에 들지 않을 때는 사정없이 회초리를 맞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에는 꿈에도 수원은 명창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어떤 모진 공부라도 모두 받아 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유명한 명창 스승님들에게 공부를 하면서도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남들이 잠자는 밤에 몰래 밖에 나와서 목청을 가다듬어 보기도 했다.
명창. 명창. 나는 14살의 어린 나이에 대구극장에서 단가 한 대목으로 ‘대구에서 소녀 명창 났다’라는 말을 들었었지만, 정말 자타가 인정하는 명창 대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던히 노력을 해야 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조학진, 박동실, 유성준, 그리고 이기권, 박녹주 선생에게서 소리 공부를 하면서 몇 차례의 도야를 통해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뗄 수 있었고, 강태홍, 오태석 선생에게서 가야금 병창을 사사받았다.
이러한 스승님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나는 1940년, 스무살 나던 무렵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전국명창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도 조선일보사에서는 우리 민족의 맥을 이어가는 뜻에서 해마다 전국명창대회를 열었는데, 나는 여기서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나는 공식적으로 명창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당시 쟁쟁했던 선배 명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공연을 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내가, 드디어 그들과 함께 명창소리를 들어가면서 공연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리하는 이들은 대게 득음(得音)을 해야만이 명창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소리 하는 사람들은 득음을 하기 위해 폭포수 떨어지는 바위 아래서 하루종일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고, 목울대에서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노력을 해야 비로소 명창이 된다고 한다.
그래도 안될 때는 똥물을 마셔야 한다고 한다. 실지로 이렇게 해서 득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을 한번도 목격해 보질 못해서 믿진 않는다.
나같은 경우는 여러 스승님들을 모시고 백일 공부를 할 때 못이 붓고, 가래에서 약간의 피가 섞여 나온 적은 있지만, 이것은 몸이 허약해지고, 감기 기운이 있어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매일매일 힘을 주어서 소리를 하니까, 전체적으로 배가 부어 오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폭포 옆에서 훈련을 하는 것은 자기 성대가 어느 정도 폭포 소리를 능가하고 목이 트여졌는지 실험을 하는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나는 도야(陶冶)를 통한 백일공부를 마치고 6개월 정도 지나면서 내가 느끼기에도 굉장히 소리가 좋아졌다는 느낌을 실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또 생각나는 것은 명창이 되고 싶어 소리 공부를 하던 중, 닭목울대를 먹으면 목이 좋아진다고 해서 어쩌다가 닭고기를 먹을라치면 꼭 닭목울대부터 먹던 기억은 있지만····
아무튼, 이렇게 힘든 과정을 통해서 득음을 한다는 말은 그만큼 죽을 노력을 해야 득음을 하고 명창이 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득음을 했다는 명창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런 일화도 들린다.
대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혼자 산에 들어가 토굴을 파고 보통 3년정도 소리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 와서는 소리를 전혀 모르는 머슴들만 모아놓고서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밤새도록 머슴들이 자기 소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탁주를 받아 놓고 돼지를 잡아 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소리를 하다가 머슴들이 졸거나 집에 돌아가면, 소리꾼은 자기 실력이 아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다시 토굴로 돌아가 소리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피나는 자기훈련, 그것만이 대명창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 그리고 그 윗대 명창들이신, 권삼득, 송흥록, 박기홍 등등, 이런 분들은 실지로 토굴을 파고 소리공부를 했다고 한다.
예부터 예술가나 정치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열 배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어떤 분야든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눈물 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예술의 길은 참으로 멀고 험난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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