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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6. 여보세요, 난 여자예요.2022-10-01 16:21
작성자 Level 10

6. 여보세요, 난 여자예요.

 

남장으로 오해 산 일목장군


요즘 텔레비전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요란한 조명 하며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괴성은 또 어떤가. 그리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노래들 하며, 소위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세대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팬들의 그것을 보면, 우리 대중 문화가 너무나 서구화가 되지 않는가 하는 우려도 앞선다.
하기사 나도 과거 창극단 시절에 이런 극성 팬들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이 있긴 하지만 요즘처럼 철모르는 학생들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화중선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을 시작으로 공연 활동을 시작해, 한양창극단을 거치면서 극성팬들의 싸인 공세를 많이 경험했는데 동일창극단(東一唱劇團)에서 활동하던 시절, 인기 때문에 치렀던 곤욕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창극은 당시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창극의 역사는 1902년 원각사(圓覺社)에서 당시 판소리 명창이었던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등이 ‘창극춘향전’을 공연하면서 서울 장안에 인기를 끌자, 그 뒤 창극이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그 당시 많은 국악인들은 이 창극을 공연 무대에 올리면서 거기서 나온 수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창극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많은 극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동일창극단은 내가 공연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그동안 쌓아온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본격적인 창극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동일창극단은 원래 하익원씨가 조직한 극단인데, 한 일년여 후에 임방울이 대표를 맡고, 내가 창극단 단장으로 취임을 하면서 재창단을 했다.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세살이 되던 해인 1943년 5월이었다.
당시 동일창극단에서 같이 활동하던 국악인들은 박녹주, 박초월, 임방울, 김옥진, 안기옥, 조상선, 정남희, 임소행, 정광수 등 아주 쟁쟁한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 동일창극단은 1년 중 가장 더운, 여름 한 철과 가장 추운 겨울만 빼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활동을 했다.
창극단 창설 당시, 무대에 올린 ‘일목장군(一目將軍)’은 아주 큰 인기를 끌었다.
일목장군은 순수한 우리말로 외눈장군이라는 말로, 주요 내용은 신나라와 당나라와의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 고구려의 한 장군이 전쟁터에서 한 쪽 눈을 잃어버리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장군의 용기와 사랑을 그린 이야기였다.
나는 여기서 다른 남성 출연자들을 제치고 장군역을 맡았고, 박초월씨가 나의 상대역인 아리수역을 맡았다.
나는 특히 여창남역(女昌男役)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는데, 아마 일목장군에서의 남자 역할은 국내 창극단에서 여성이 남성역을 맡은 최초의 기록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때부터 남성 역할을 맡기 시작해서 나중에 여성 국극에서까지 극중에 남자 역할을 도맡아서 했는데, 동일 창극단에서의 나의 여창남역(女昌男役)은 나중에 여성 국극 탄생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목장군 공연은 한동안 아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우리 동일 창극단은 큰 도시를 중심으로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기도, 강원도,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신의주 등, 국내 공연은 물론이고 중국 길림, 하얼빈, 훈춘, 목단강까지 휘돌아 내려오면서 공연을 했다.
우리 극단은 어딜가나 인기였다. 때로는 극성 팬들에게 시달려 피신하기도 했고 몰래 무대 뒤로 도망치다시피 나왔던 적도 많았다.
만주 공연에서 나는 일목장군의 인기세를 정말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만주공연 역시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해서 공연을 마치고 박수와 환호성을 치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극단 단원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무대 뒤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끝나고 구경왔던 사람들 중에 30여 명의 여성들이 무대 뒤 분장실로 몰려 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나를 납치하다시피 끌고 가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손을 뿌리치며 왜들 이러냐고 소리쳤다.
“미안해요, 그러나 저희들은 이날 평생동안 당신처럼 멋진 남성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만은 아무 말씀 마시고 저희들을 따라 오세요. 정중히 모실게요.”
그들은 나를 진짜 남자로 알고서 아주 조용한 곳으로 모셔 가겠다는 것이다.
“어허, 이 아가씨들 가만히 보니 바람이 단단히 나셨군 그래.”
나는 그들을 놀려줄 양으로 한껏 목소리를 깔고서 말했다.
“그래요, 바람 났어요.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아무튼 가시지요.”
어허, 이거 정말 아무리 일목장군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고 하지만, 여자인 나를 남자로 알고 모셔가겠다니. 그들은 평범한 여성들은 아니고 어느 요정집 기생들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다시 점잖게 한마디 했다.
“이보소, 나도 집에 가면 아내가 있는 몸이외다.”
“뭘 그러세요. 객고도 푸실 겸 하루저녁만 저희들과 놀아주시라는 건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남자다운 남자가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남자로 분장한 여자를 몰라보고 무조건 요정으로 가자고 하니. 나는 그제서야 내 신분을 밝힐 요령으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보소, 사람 잘못보셨슴니더. 난 말입니더, 남자가 아니고 여자입니더.”
그러나 그들은 나의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머,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요.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살짝 빠져 나가실려고 그러시죠? 안돼요. 장군님은 오늘 우리 차지에요.”
“이봐요, 뭔가 오해를 하시고 있는 모양인데, 난 정말 여자라예. 자 보이소. 이 머리, 머리가 길잖습니꺼.”
나는 머리에 쓴 투구를 벗고 그 속에 감춰진 긴 머리채를 보여 주었다.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배우들은 원래 모두 머리를 기른다는 말이 있던데, 그러면 속을 줄 알고요?”
하긴 여자가 남자 분장을 하고 장군역을 했으니, 그들 눈에는 잘생긴 미소년으로 보일 수 밖에.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당신네들이 여자라는 것을 믿겠습니꺼.”
이거 어디를 만져 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 양반, 장군으로 출연하셔서 꽤나 호탕하신 양반으로 알았는데, 남자가 좀스럽게 이러실거예요. 이 정도 했으면 여자들 체면도 좀 생각해 줘야 하잖아요.”
그러면서 다짜고짜 나의 팔을 붙잡고 이끌었다. 순순히 따라 오라는 것이었다.
“어머!, 그런데 이 손 좀 봐, 어쩜 이렇게 여자 손처럼 예쁠까?”
그녀들은 한 술 더 떠, 나의 손을 번갈아 만져 보면서 경탄해 하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갑자기 이거 큰일났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러다간 꼼짝없이 납치될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거 어쩌랴. 나는 알았노라면서 갑자기 웃옷을 훌훌 벗어부쳤다. 그리고 가슴을 풀어 헤쳤다.
“여보이소, 이래도 내가 남잡니꺼?”
“아, 어쩌면! 세상에.”
그들이 본 가슴은 남자의 탄탄한 가슴이 아니고, 가슴이 볼록한 여자의 가슴이었다. 그제서야 여자임을 안 그들은 기겁을 하면서 뒷걸음질 치더니, 실망의 빛이 역력한 얼굴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남자인중만 알았던 장군이 갑자기 가슴을 드러내는데, 느닷없이 볼록한 가슴을 지닌 여성이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당신을 잊느라 혼났습니다.


일목 장군의 인기로 인해 이렇게 여자들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받자, 나는 슬그머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내가 정말 외모가 남자 같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연기가 그만큼 완벽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걸까.’
하긴 내 얼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박귀희가 정말 남자같이 생기지 않았나 하는 오해도 생길 법하다. 그래서 이거 좀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같지만, 이왕 외모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를 짝사랑한 남자들 이야기 좀 해야겠다.
내가 이화중선 일행과 함께 활동하던 무렵이니까, 스물 한 살 무렵쯤으로 기억된다. 이화중선 일행과 지방 공연차 전라남도 해남, 강진에 간 일이 있었다.
우리 극단은 공연이 끝나고, 강진의 갑부인 김충식씨라는 분의 저녁 초대에 초청되었다. 당시의 지방 유지들, 특히 전라도 지방 토호들은 이 예술에 관심있는 분들이 많아서 우리같은 극단이나 소리하는 사람들이 오면, 뒤에서 후원도 해주고 식사 초대를 해서 객고를 풀어 주기도 했다.
그 때 그곳 강진에는 윤 아무개라는 군수가 있었는데, 당시 약관 25세의 나이로 군수가 된 촉망받는 공직자였다. 물론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총각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는 몇몇 지방 유지들과 함께 그 젊은 군수도 초청 받아 와 있었다. 그 청년 군수는 인물이 수려한 미남형 얼굴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편인지, 우리들이 창을 부르고 노는데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 앉아 묵묵히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연회가 끝나고 집을 나오려고 하는데, 그 총각 군수는 내 앞에 나와 자기는 그곳 군수 아무개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 이름을 물었다.
“박귀희라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 총각군수는 예절이 깍듯했다.
나는 여흥이 끝나자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이튿날 우리는 해남 강진을 떠나 광주(光州)의 송정리(松丁里)극장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참 공연을 하다가 관객석을 보니 그 총각 군수의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강진에서 광주 송정리까지의 거리는 족히 2~3백리길,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총각 군수는 강진에서 송정리까지 줄달음을 쳐서 나의 공연을 보러 온 것이었다. 물론 그 당시만 해도 그저 열성팬이지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그 후 그 총각 군수의 얼굴은 더 이상 나타나질 않았다.
그리고 7~8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해방이 되고 지금의 봉익동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집에 말쑥한 손님 한분이 찾아 왔다. 바로 그 총각 군수였다. 세월이 한참 지났지만, 그 때 당시에 인상 깊게 봤던 탓인지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오랫만입니다.”
내가 공손히 인사를 하자, 그도 역시 공손히 인사를 받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 집에 방문을 다 하시고.”
그 사람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오래된 일이라서 박여사는 모르시겠지만, 전 정말 그때 박여사 때문에 아주 혼났습니다.”
“저 때문에 혼나다니요?”
난데없이 찾아온 양반이 불쑥 하는 말이 나 때문에 혼나다니.
“박여사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해서 말입니다. 결국 그 뒤에 금강산까지 들어가 한동안 마음 수양을 하고 내려 왔지요.”
“호호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 지금은 물론 결혼 하셨겠죠?”
“네, 그때 박여사를 잊기 위해 부랴부랴 색시감을 구해 결혼했지요. 지금은 애가 셋이나 됩니다.”
나는 한바탕 파안대소를 했다.
물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순진했던 총각 군수는 60~70년대에 우리나라 중진 정치인으로 활약했었다.
이 외에도 몇 건의 에피소드가 더 있지만 그만 두기로 하자. 괜히 이야기 하면 나의 낯만 간지러워지는 것 같고, 또 나로 인해서 가슴앓이를 했던 분들에게 죄송하고 미안하기 때문이다.

  

불후의 히트작 선화공주


일목장군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동일창극단의 인기는 가는 곳마다 하늘을 찔렀다. 그 때 당시에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공연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매표소에 팔린 돈만 해도 가마니에 수북히 쌓일 정도였다..
‘일목장군’이 한동안 인기를 누리면서 전국을 순회하고 다니면서 우리 창극단에서는 또 다른 작품을 내놓았다. ‘선화공주(善花公主)’였다.
‘선화공주’는 삼국시대의 설화(說話)인 서동요(薯童謠)를 주제로 한 것인데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백제의 맛동이가 사랑하는 내용이다. 맛동이는 훗날 백제 무왕이 되는데 젊은 시절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애끓는 연정을 전하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궁에서 쫓겨난  선화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결국 선화공주에게 사랑을 얻게 된다.
이 ‘선화 공주’는 우리 창극사에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후의 히트작품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식민지 시대의 삭막했던 시절, 옛 고전에 나오는 공주와 평민의 러브스토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게 했던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선화 공주를 사랑하는 맛동방 역할을 맡았고, 방자와 같은 역할인 쇠돌이 역은 월북한 조상선씨가 맡았다.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한동안 남성 역할을 맡아오면서도 내가 남자역을 잘 해낼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한두 번 공연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극중에 몰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배역에 빠져 점차 ‘남성역’하면 ‘박귀희’로 굳어져 갔다.
‘선화 공주’는 훗날 국내 최초의 총천연색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아마 56년도가 아닌가 싶다. 원로 영화 배우인 김희갑씨가 당시 쇠돌이 역할을 맡았고, 내가 역시 맛동방 역할을, 그리고 영화배우 김근자씨가 선화공주 역할을 맡았다. 또 당시에 이름이 쟁쟁하던 영화배우 김승호, 주선태 등이 참가했다.
이 ‘선화 공주’ 영화가 개봉되자, 장안에 인기과 화제를 모았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는데, 이 영화 이야기는 뒤에 하기로 하겠다.
‘선화공주’의 인기는 참으로 대단했다. 소위 요즘 말하는 팬레터라는 것도 많이 받아 보았다. 공연이 끝나면 수북히 쌓이는 꽃다발과 엽서 등등은 우리의 인기를 실감나게 만들어 주었다.
언젠가는 공연을 마치고 극장 문을 나서고 있는데 열 예닐곱쯤 먹어 보이는 여학생이 나를 가로 막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하는 말이
“왕자님 사랑해요, 제 사랑을 받아 주세요. 저는 왕자님을 너무너무 사랑해요.”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무슨 광고에 ‘싸랑해요’라는 문구가 눈에 띄어 속으로 웃은 적이 있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시절 난데없이 팬이라고 자처하는 여학생이 나타나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니 당황 할 수밖에. 당황한 나머지 학생이 이러면 못쓴다고 점잖게 타이르자, 갑자기 그 여학생은 주머니에서 편지지를 꺼내더니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는 것이었다.
“아니 학생 왜 이래요. 이봐요.”
“.............”
“누가 말려 줘요. 학생. 이러지 말아요.”
그러나 내 말은 들은 척 만 척, 그 여학생은 편지지에 자신의 사랑을 왕자님께 보낸다는 혈서를 쓰더니 나에게 쥐어 주고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훗날 몇 십년이 지나고 집안 정리를 하다가 나는 이 혈서를 발견했는데 편지지에 검붉게 바랜 혈서를 보니 괜히 기분이 이상하고 섬짓해서 그냥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언젠가 인터뷰를 온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당시의 산 증거물을 버렸다며 아쉬워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혈서를 준 그 여학생, 그 때 당시의 그런 열렬한 정열을 가졌던 그 여학생은 지금쯤 중년의 아주머니가 되었거나, 손주를 본 할머니가 되어 있을테지. 지금쯤 할머니가 되어있을 그 여학생은 요즘 심심찮게 문제가 되고 있는 공연장에서 학생들이 괴성을 지르고 까무러치는 세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세태는 변하고 사회가 발전해 그 유형은 조금씩 달랐을 뿐이지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열렬히 보내는 팬들의 박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나 싶다.
부끄러운 이야기같지만, 나는 ‘일목장군’과 ‘선화공주’를 통해서 몇 개의 상을 받게 되었다. 1942년에 연극협회에서 주는 동양극장 경연대회에서 연기상을 받았고, 1944년도에 연극협회에서 주는 황금좌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역시 1945년 2월에도 연극협회에서 주는 명치좌 연기상을 각각 수상했는데 젊은 시절 나의 연기력을 평가 해주는 영광스러운 상이긴 하지만, 상이름이 명치좌니 황금좌니 하는 일본 명칭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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